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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부 수련회 설교 2, 로마서 12: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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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부 수련회 설교 2, 로마서 12:1-8

jo_nghyuk 2023. 4. 30. 01:44
로마서 12장 1-18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1
제가 청년의 때에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책이 <젊은이여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기억하는 이유는 거기에 담겨 있는 편지글 형식의 글 때문인데요. 청년이 친구에게 쓴 편지의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그러나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그 청년이 다른 청년에게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것인지에 대해 아주 치열하게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고민하는 이유는, 사람이 맛있는 것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꿈을 이루어도 거기에는 어떤 허망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큰 성과를 낸다고, 큰 쾌락을 누린다고 인생의 의미가 채워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아주 커다란 갈망을 심어 두셨습니다. 그리고 이 갈망은 늘 의미를 추구하는데, 사실은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만족을 할만큼 이 갈망은 아주 무한합니다. 
 
2
저는 소위 말하는 모태신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는 것은 믿었지만 저는 교회에서 찬양을 해도 기쁘지 않았고, 사람들이 왜 기쁘게 손뼉을 치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인생의 채워지지 않는 깊은 공허함 때문에 늘 괴로웠습니다. 무엇을 해도 그 공허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취미에도 심취해보고 했지만, 공허는 다시 저를 찾아왔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채 입대를 했는데, 제가 훈련병일 때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잠시 휴가를 나가서 장례를 치르고 부대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갑작스레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이 우울증을 무엇으로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동안 의지하던 모든 것은 도움이 되기 보다는 해가 되었고 증세를 악화시켰습니다. 매일 이불을 뒤집어 쓰고 몰래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고참이 우는 저를 발견하고, 중대장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중대장이 저를 병원이 아니라 교회에 보냈습니다. 군대 안에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회가 있습니다. 저는 한달 내내 기도회에 나가 울기만 했습니다.  눈물만 흘렸습니다. 옆에 있던 군종병, 군대 교회에서 일하는 장병이 너무 시끄럽다고, 울기만 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런데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 군종병은 제 옆에서 찬양을 하기도 하고, 저를 달래보기도 하고, 나무라보기도 했지만, 제 상태는 같았습니다. 
그렇게 한달을 기도회에서 울던 어느날,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눈 앞에는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겨울 나무가 있었고, 갑자기 환한 빛이 그 나무를 따뜻하게 감싸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종혁아, 내가 너를 누구보다 가장 사랑한단다”
그 말씀을 듣고 저는 그 이후로 눈물이 멈추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흘리는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었습니다. 찬양을 드리면 나를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에 늘 눈물이 낫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슬픈 사람이 아니라 기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찬양을 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예배만 하면 너무 신나게 춤이 절로 나왔습니다. 사실 그렇게 예배하면 옆에서 비웃는 소리도 들립니다. 그런데 그 춤과 기쁨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예배하다 보니 주위 사람들이 전염이 되어서 예배 시간이 되면 제 옆에 있는 사람들은 다 같이 춤을 추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진 기쁨이 전염되었습니다. 저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3

오늘의 구절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은 무거운 명령이 아닙니다.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사랑의 말씀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을 본받으라” 또한 억지로 힙겹게 지켜야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해 열어놓으신 축복의 길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는 것은 허망하지만, 주님을 본받는 것은 늘 기쁨이 넘치고, 생명이 가득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서 죽음을 가져가시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희생의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살아납니다. 능력이 있게 살아납니다.
저는 여는 예배에서 공동체인 우리는 Kollektivsingular라고 표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혼자 존재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으로 독일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평안한 마음으로 잘 믿는 이유는 담임목사님의 희생과 헌신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십자가를 지고 희생했기 때문에 내가 평안하고 기쁜 것입니다. 오늘의 수련회를 위해 바자회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교회 성도분들의 헌신으로 열린 수련회입니다. 그리고 매시간 섬기는 임원들도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만하임 청년부 수련회 표어가 <더 돌리리>라는 것을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어떤 청년들이기에 주님께 더 돌리자를 표어로 삼을까? 하나님, 저 도와주세요. 뭐 주세요. 힘들어요. 이런 게 아니고, 하나님, 내가 당신께 더 돌리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다소 놀랐습니다.
사실 <더 돌리리>라고 말하는 것은 <다 돌리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의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은, 지금의 수준에서 약간 더 돌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종교와 다른 이유는, 내가 주님을 믿는 이유가 내가 잘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어야 하는 나를 살리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더 돌리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더 돌리는 것은 <다 돌릴 때> 가능합니다. 이전에 드리지 못했던 부분까지 드려야 합니다. 
바울이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했을 때, 그 의미는 “다 돌리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자리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습니다. 앞으로도 내가 생명을 얻고 은혜를 얻는 자리는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자리는 내가 새롭게 죽는 자리가 아니라, 이미 내가 죽었고,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사는 자리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자리입니다.
 
4
바울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변화를 받으라고 말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로마서의 맥락에서 “이 세대를 본받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사랑보다 자신의 유익에 더 가치를 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보다 우리를 사랑하는 것에 가치를 두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으며, 나의 꿈을 이루어도, 나의 성과를 내어도, 온갖 즐거움을 좇아도, 허망한 이유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할 대상>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은 이 <사랑>의 무한함을 채우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커다란 공허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채워지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채워지고, 이웃을 사랑할 때 채워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지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서로가 지체가 되었음은, 서로가 자기의 은사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관계에 들어갔음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하나님이 은사를 주시고, 시간을 주시고 힘을 주신 이유는, 내 손을 펴서 이웃과 사랑하는 데에 쓰라는 의미입니다. 
이사야서 58장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의 장입니다. 
이사야서는 네가 주린 자를 먹이고,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하나님이 너를 치료하는 광선이 급속하고, 네 뼈가 견고해지고, 너는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쏟으면, 하나님이 그 위에 자신의 풍성함으로 쏟아주십니다. 내가 가진 것을 흘려보내면, 하나님은 그 위에 폭포처럼 쏟아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이 흘러가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물 댄 동산은 그러므로 사랑하는 나의 심령입니다.
이 물댄 동산은, 처음 하나님이 지으신 에덴동산의 모습입니다. 에덴 동산에서는 네 가지의 강의 사방으로 흘러넘치며 주변에 생명력을 넘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에덴동산이 어떻게 파괴되었을까요? 아담의 불순종과 사랑하지 않음으로 인해 이루어졌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다르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기 유익을 위해 삽니다.
이 에덴동산의 회복은, 내가 물댄동산이 됨으로 이루어집니다. 내 안에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회복될 때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적 권세가 회복되고, 자유함이 회복됩니다. 
 
5
영적 권세의 회복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왕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이렇게 쓰여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 왕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였다. 그런데 이 왕은 산당을 제하지는 않았다.
어릴 때에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게 무슨 평가인가? 이 왕은 정직하였는데 산당을 제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평가인가? 이것은 칭찬인가 비판인가? 정직하였다고 칭찬했으면 조금 잘못해도 봐주는 것이 아닌가?
나이가 들면서,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질투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합니다. 불타는 불꽃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뜨겁습니다. 그래서 그의 자녀들이 정직하기를 원하고, 정금처럼 단련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계시록에서 칭찬할 것을 칭찬하시되, 책망할 것을 책망하십니다. 주의 신부가 된 교회를 사랑하셔서 거룩하게 만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왕이 정직하였으나 산당을 제하지 않았다는 말은, 이 왕이 하나님을 믿었으나, 그리고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했으나,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당은 우상의 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마음은 하나님의 성전입니까? 산당의 요소가 남아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은 성경에서 말하기를, 어떠한 건물이기 이전에, 나의 몸입니다. 내가 기도하면 나의 몸은 성전이 됩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으면, 나는 세상을 본박고 산당처럼 변합니다.
저는 바이마르에 와서 참 아름다운 환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날 온 힘을 다해 기도하는데 기도할 것이 너무 많아 숨이 차올랐습니다. 그런데 기도할 것이 영적으로 너무 긴박하고 많아서 기도를 그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숨이 차오를 때 보인 환상이 아름다운 성전의 환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숨이 차서 기도를 좀 살살 할려하니 다시 그 성전이 사라지고, 다시 전심전력으로 기도하니 다시 성전이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어떻게 여기시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몸은 기도하는 주의 성전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청년의 때에 여러분의 몸을 성전으로 드리십시오. 적당한 기도처가 아니라 불이 붙는 기도처로 만들어보십시오. 바울도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말합니다. 기도는 원래 힘써 드리는 것입니다. 주의 성전의 촛불은 힘있게 타올라야 합니다. 나라고 하는 성전 안이 기도로 가득차게 할 때, 나는 주님의 거룩한 영적 권세를 회복하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에덴 동산, 물댄 동산 가운데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내 안에 주가 가득 찰수록, 세상은 작아집니다. 우리, 세상이 작아질 때까지 뜨겁게 기도합시다. 내 안의 우상이 부숴질 때까지 뜨겁게 회개합시다. 
젊은이여,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젊을 때에 여호와를 힘써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축복입니다. 젊을 때에 전력투구하며 달려갈 수 있는 것은 참으로 주가 열어놓으신 길의 축복입니다. 젊은이여, 기도로 뜨겁게 사시고, 사랑으로 뜨겁게 사시고, 열정으로 뜨겁게 사십시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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