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Niederlande: 엎드림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Niederlande: 엎드림

jo_nghyuk 2023. 5. 2. 10:22

복음을 올바로 전하려 할 때에 불이 붙는다. 나 자신의 욕망과 지성과 고집의 환도뼈가 부러질 때까지 부단히 전심전력을 다해야 불이 늘 살아 있을 수 있다.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 오히려 스스로가 주 앞에 쇄신되는 시간이었다. 사람은 주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라는 단순한 답을 내기까지는 분투하는 첩경이 필요하다. 그 길은 울퉁불퉁하지만 올곧다. 말씀을 전하기 직전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 고치는 것은 단순한 윤문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다시 쓰는 일이다. '새롭게 다시'라는 말은 '오래된 원본'을 전제로 한다. 고쳐쓰는 것은 글의 층위를 다단화시키는 것이고, 그로 인해 풍성한 의미를 배양할 수 있게 준비해놓는 작업이다. 동시에 고쳐 쓰는 것은 그 편지를 읽는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행위이다. 설교는 편지글과도 같다. 수신자를 위해 쓰는 글이 편지이며, 그 편지에는 수신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편지를 계속 고치는 사람은 그 편지를 받는 사람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배려한다. 그렇게 고쳐쓴 글은 제삼자가 읽어도 그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나와 관련이 없던 사람도 내가 애정을 다한 글에서 나의 진심을 느낀다. 전심전력을 다하면 진심은 (대체로) 통할 것이다. 

사역이 끝나고 가족과 네덜란드로 향했다. 네덜란드에 혼자 갔을 때에는 아내와 아들의 환상을 보았고, 그 뒤에는 아내와 둘이 갔으며, 이제는 아내와 아들과 셋이서 함께이다. 네덜란드의 시간 위로 내가 하나님과 보낸 시간의 흔적이 새겨지고, 그 위에 아내와의 시간이, 이제 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겹쳐지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의 전체가 형상화된다. 이 겹쳐짐은 과거의 흔적을 새롭게 되살리고, 새로운 의미와 함께 그 약속을 다시 발견하게 한다. 아내와 함께 암스테르담에서 프랑크푸르트를 지나 하이델베르크로 내려왔던 12년 전과 반대로, 지금 우리는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다. 그리고 다시 독일로 돌아갈 것이고,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데 이 반대 방향의 경험에서 오는 의미의 다양화가 참 재미있다. 그 의미의 다양화는 다시 하나의 주제를 이룬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나의 삶도 고난이 있으나 그 상흔 위로 축복이 흘러넘친다. 고난 속 나의 약함의 트랙 위로 하나님의 은혜가 달린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신실하지 못한 나를 어두운 새벽에도 깨우시고 다그치시며, 훈육하시며 또 타이르신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여전히 디모데와 같다. 젊은 친구들에게는 바울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나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스승 앞에서 여전히 어리고 연한 디모데이다. 훈련부족의 디모데이며, 고집 센 디모데, 여전히 세상의 유혹과 싸워야 하는 디모데이다. 신앙인은 자신이 달려갈 길이 부단히 멀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 정도면'하는 생각은 그를 전혀 성장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뒤로 가게 할 뿐이다. 그러한 점에서 신앙인은 늘 새롭게 출발한다. 매 순간은 새로운 종결지점이며 동시에 새로운 출발지점이다. 어떤 의미들은 종결되고, 어떤 의미들은 새롭게 창출되어야 한다. 어떤 방향은 배제되고, 어떤 방향들은 새롭게 정위되어야 한다. 신앙인은 죽을 때까지 길 위에서 달린다. 나 혼자서는 자전거로 달렸지만, 둘이서는 ICE를 타고 달렸고, 셋이서는 우리만의 고요한 방Abteilung 안에서 달린다. 양식은 다르지만, 신앙인은 늘 달리는 존재이다. 앞에서 주께서 부르시는 푯대가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암스테르담에서 하이델베르크로 달리는 방향으로, 때로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위트레흐르트로 달리는 방향으로 하나님은 다르게 부르신다. 그러나 그 반대되는 것처럼 느껴진 그 방향들이 다차원적인 어떤 형상을 이루게 되는 것을 마침내는 보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왜 반대의 방향인가에 대한 거스름이 아니라, 어디를 가시든 주께 순종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자기 부인이다. 자기 부인은 자기 욕망과 지성과 고집의 부정이다. 자기 부인은 하나님 인정과 맞닿아 있고, 하나님 인정은 결국은 주 안에서 인정받음을 향하는 길이다. 그러나 늘 그 길은 자기 부정의 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땅이 낮을수록 하늘의 위대함이 보인다. Niederlande의 구름이 가장 훌륭하다. 땅이 엎드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차라리 바보가 되자. 사람 앞에서 차라리 바보가 되자. 인정받기 보다는 인정해주는 사람이 되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사람을 인정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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