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8월 3일 저녁설교, 시편 8편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8월 3일 저녁설교, 시편 8편

jo_nghyuk 2023. 8. 3. 23:43
시편 8편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결국 다윗은 형통함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찬양합니다. 4일 동안 8번의 설교를 하면서 시편 8편까지 다다른 보람이 있습니다.
8번의 시편 설교 중 6편은 고난의 아픔과 탄식으로 가득했습니다.
1편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 있는 사람을 출발해서, 고난으로 점철된 6편의 시편들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 8편의 영광의 빛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만한 점은 고난을 통과한 다윗이 노래하는 영광의 빛은 결국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영광을 고난 후에 노래합니다. 
고난을 지난 자신의 영웅담이 아니라, 자신의 인내가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다윗은 다시 하나님만을 자랑합니다.
오히려 여기서 다윗 자신은 매우 작은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나의 어떠함으로 고난을 통과한 것이 아니요,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의 입에 주의 권능을 주셔서 원수와 보복자들을 주님께서 잠잠하게 하셨다.
어린 아이와 젖먹이들이 어떤 언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원수와 보복자들의 말을 그치게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능력이 자신의 것이 아니며, 자신의 입에 권능을 주신 하나님의 것임을 겸손히 고백할 수 밖에 없게 합니다. 
 
다윗은 주님이 지으신 하늘과 달과 별들을 보면, 사람이 매우 작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작은 사람이 무엇이길래 하나님은 돌보시는 것입니까? 하고 질문합니다.
사람이 영화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 자체가 존귀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존귀하지 않은 사람에게 존귀의 관을 씌우시는 이유는, 사람에게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연약한 사람, 어린 아이 같고 젖먹이 같은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은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고난의 끝에서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나는 작고 하나님은 크시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의 끝에서 다윗은 사람의 위대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의 어린 아이 같음과 아무 것도 아님을 고백하고, 대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합니다. 
고난은 다윗을 겸손하게 만들고 구원이 자신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음을 고백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사람을 참 존귀하게 대하십니다. 이 연약한 사람을 주의 권능으로 붙잡아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는 권세를 주셨지만, 그 사람이 얼마나 작고 연약한지를 고백합니다.
땅에 기는 것, 하늘에 나는 것, 물 속에 헤엄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인간 아래 두셨다고 합니다.
얼마나 영화로운 위치입니까?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높여주신 것에 대해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높이신다고 해서 내가 높아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 5절의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는 한글 성경의 이전 번역에서는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로 되어 있었습니다. 
원어에서 엘로힘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을 후대 사람들은 일부러 천사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라는 표현 자체가 신성모독적인 표현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라는 번역을 사용하였고, 인간을 하나님만큼 높이려는 생각에 반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실 때, 우리는 높아져서는 안됩니다. 
자존감과 자고함은 다른 것입니다. 자존감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도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고함은 하나님이 나를 존귀하게 여기신다고 나도 나를 높은 사람처럼, 다른 사람보다 존귀한 사람처럼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은사들을 주시고, 우리를 존귀하게 하실 때, 우리의 이름을 높이실 때,
우리는 무조건 엎드려야 합니다. 낮아져야 합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하고 반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더 찬양하고, 자기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고난의 시편들을 통과하고 승리의 감격에 차서 다윗은 무엇을 노래합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연약함과 어린아이 같은 미성숙함, 그리고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위대하심에 대해 노래합니다. 
 
그래서 이 시는 하나님의 이름의 아름다운 영광에 대해 노래하며 시작하고, 마찬가지로 주의 아름다운 영광을 노래하며 끝을 맺습니다.
다윗은 주를 높이며 묻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대하십니까?
이것은 사람의 존귀함과 오묘함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이토록 흔들리고 연약한 내가 무엇이라고, 당신은 나를 선대하시고 은총을 주십니까?
당신이 이렇게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연약하고 흔들리는 나는 대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의 답은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로 쓰여집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사람을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결국 하나님이 사람의 답이 되는 것이지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답변되어질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만 물어서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주님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나는 어린 아이와 젖먹이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낳으신 어린 아이이며, 주님 품에 있는 젖먹이입니다.
나는 약하지만 당신의 사랑을 받아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높이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늘 영광의 순간에, 그 영광을 취하지 않고 하나님께 그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참된 사람의 형상입니다. 
오만한 사람은 스스로를 높이지만,
예수님 안에 보여주신 참된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높이실 때,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서 
주님을 그 자리에 앉힙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시편은 고난 중에도, 형통 중에도, 주님만을 노래합니다. 
우리도 어려울 때에나, 높아질 때에나, 늘 주님만을 노래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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