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8월 21일 저녁설교, 로마서 1:1-7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8월 21일 저녁설교, 로마서 1:1-7

jo_nghyuk 2023. 8. 22. 00:15
8월 21일 월 저녁기도회
말씀 로마서 1:1-7
  • 오늘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다
찬송 364 통 482
  • 내 기도하는 그 시간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로마서의 이름은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이 편지의 1절에 발신자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발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수신자는 7절에 나와 있습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가 이 편지의 수신자입니다. 
발신자는 종이고, 수신자는 사랑받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쓴 것은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세운 것도 하나님입니다. 1절에 보면,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불러서 편지를 쓰게 하십니다. 주께서 약속하신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그 편지의 내용으로 쓰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편지의 내용은 이미 약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편지의 내용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3,4절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소개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이고, 성령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묘사입니다. 육신으로는 이스라엘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자들 같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부활하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로마 교회의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 교회에는 서로 다른 신앙의 색과 서로 다른 출신의 성격으로 인해 갈등과 긴장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사람들의 주님이 됨을 이 편지를 통해 전합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받는 모든 사람들이 성도이며, 편지를 받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받는 자라고 수신자를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되는 길은 사람의 어떠함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거룩함과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편지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라면,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은 예수님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신자가 성도요, 사랑받는 자라면, 편지를 받는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거룩함을 받고, 예수님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은 이것입니다. 나의 출신과 상관없이,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복음은 예수님으로부터 거룩함과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5절에서 자신의 사도의 직분은 은혜의 직분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도의 직분은 자격이 아니라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사도라 칭함을 받을 수 없는 일을 행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죄인 바울을 사도로 세운 이유는, 그 은혜와 사랑을 모든 이방 사람들에게 거저 주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5절에서 은혜의 직분을 받아 모든 이방인 중에서 예수의 이름을 믿어 순종하게 한다고 하는 이 말은 원어로, 믿음으로 순종에 이르게 한다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순종에 이르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복음도 은혜, 믿음도 은혜, 순종도 은혜입니다. 
 
사도라는 말, 그리스어로 아포스톨로스라는 말의 의미는 "보냄받은 자", "전령"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를 전달하는 우편배달부와도 같습니다. 
사도는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종입니다. 헬라어로 종이라는 말의 둘로스는 노예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낮추심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주의 사랑이 흘러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저 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인간 관계에서 상처받고 미움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거저 준 것에 대해 대가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풂은 다시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거저 준 사람은 보상을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준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잊지 못하고, 그것을 준 사람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주었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모르고 있고, 다시 베풀 줄을 모른다 하면서 상처받고 미움도 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퍼주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우편배달부인데, 우리가 사랑을 했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무엇을 주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놓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낮아지는 데에서 오는 위치 에너지와도 같습니다. 사랑은 낮출 필요가 없으신 전능한 하나님이 스스로를 십자가까지 낮추실 때 오는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낮춘 후에도, 다시 높아지는 것을 마음에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전령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은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소개서를 1절로 끝내고, 바로 복음에 대해, 이 편지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편지의 내용은 주가 주시는 "은혜와 평강"으로 시작합니다.
이 편지는 바울과 로마 교회가 주고받는 사사로운 대화가 아닙니다. 
바울과 로마 교회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 걸어오심입니다. 
그는 우리를 이렇게 부르십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나와 함께 일어나서 가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키기 위해 무거운 짐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불안케 하고 두렵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넘어진 나에게, 무너진 나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사랑받는 자여.
거룩한 자여.
다시 한번 일어나서, 나와 함께 가자. 
바울의 편지마다 "은혜와 평강" 혹은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는 인사말이 적혀있습니다.
그러나 이 인사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한 열쇠와도 같습니다. 
복음은 은혜입니다.
그것을 믿는 믿음도 은혜입니다.
믿어 순종에 이르게 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은혜를 주십시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헬라어 기도로 퀴리에 엘레이손이라고 합니다. 제가 헬라어 시간에 이 엘레이손이라고 하는 부정과거 명령문에 대해 문법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 명령문이 아니라, 부정과거 명령문으로 왜 썼는지 궁금했습니다. 선생님은 부정과거 명령문이 단 한 번의 효력을 가지는 명령문이라 합니다. 
현재 명령문은 "밥 잘 먹어라" 입니다.
부정과거 명령문은 "지금 밥을 먹어라" 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은혜를 주십니다"라고 생각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주님, 오늘도 나에게 은혜를 주세요"
"주님, 오늘도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주님에게 오늘도 말을 걸어야 하는 거지요. 
주님은 나에게 은혜를 주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기도할 때, 주님은 나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주님은 나에게 평강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기도할 때, 주님은 나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시야를 놓치고, 때로 우리 힘으로, 내가 가진 자원으로만 해결하려 합니다. 
그래서 짐은 늘 무거워집니다. 
그러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 연구를 할 때조차 기로에 막히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당신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은데, 당신이 만든 것을 알기에 내 지혜가 부족합니다. 
나의 호기심과 열정을 꾸짖지 마시고, 내게 은혜를 주셔서 당신이 지으신 이 세계의 놀라운 이치를 주의 종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소서.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늘 응답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당신의 종을 낮추셔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우리의 응답도 동일합니다. 나를 낮추며 주님께 말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 오늘도 저에게 은혜를 주세요.
오늘도 저에게 평강을 주세요.
오늘도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나를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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