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과거에 대한 성실함에 대해 본문
기억은 과거를 현재로 불러들이는 작업이다. 그 순간의 감각, 말, 공기, 불빛들이 되살아난다. 그리움은 기억의 세포를 농후하게 한다. 독일 학교 도서관에는 카페테리아가 외부와 연결되는 회전문이 있었다. 학생들이 샐러드 볼을 들고 잡담을 하면서, 담배를 피우면서, 노트북을 키고, 와하핫, 웃는 소리가 정원에 가득하다. 독일 커피는 고유의 색과 농도가 있다. 식사를 하러 철학부 학생식당으로 가는 언덕 길 나무에서 체리를 따먹었다. 풀밭에 앉아 점심식사를 했다. 커피는 거른 적이 없다.
쾰른을 지나 네덜란드 국경으로 들어서면 푸른 띠를 두른 노란 기차가 나온다. 암스테르담 셀트랄에서 터져나오는 소란함, 수없이 탔던 트람, 수없이 걸었던 운하, 수없이 먹었던 감자 튀김의 냄새를 나는 재현할 수 있다. 그래서 기억은 현재화이다. 기록해둔 수기들을 읽으면 네덜란드 도시 거리의 지명과 빵의 가격이 그 재현작업을 더 생생하게 한다. 기록은 나의 생각을 그곳으로 향하게 하고, 이곳을 넘어가게 한다. 주어진 지평보다 더 큰, 무한한 지평으로 넘어가게 하는 것은 언제나 상상력이다.
기억은 할 때마다 새롭게 재형상화된다. 늘 새로운 의미부여를 얻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나 자신이 달라졌는데, 재현하는 의미의 방향과 감각에 대한 알아차림도 달라지지 않겠는가?
불성실한 자는 여유를 말하고 여유가 없는 자는 성실을 말한다. 때로는 놀 줄 몰라서 내 존재가 먹통이 되지만 때로는 먹통처럼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인간 실존인 것이다. 사람은 혼자서 밸런스를 찾지 못한다. 밸런스는 늘 다른 두 개 사이에서 발생하는 아슬아슬한 역장 같이 느껴진다. 노는 것도 누군가를 통해서, 일하는 것도 누군가를 통해서, 기억도 무언가를 통해서, 재현도 매개를 통해서. 인간은 한없이 연약하다. 혼자 우주에 서 있지 않고 무언가를 매개로 하고, 어딘가를 경유해서 돌아와야 하고, 누군가를 돕거나 의지해야 하는 바스라지기 쉬운 생일 촛대 같다. 탄생을 기념하는 불꽃이 그토록 연약한 심지 위에, 아주 잠깐동안만 머무를 수 있음은 우리 존재에 대한 기가 막힌 은유가 아닐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입어 살아왔으면서도, 여기까지 온 것이 그들 덕분이라 말하면서도 나는 진 빚을 갚아볼 의리 있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 먹통 존재이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식으로 대한다면 답답해하면서도, 정작 내가 다른 이에게 그렇게 먹통처럼 군다는 자각은 왜 이다지도 늦게 드는 걸까? 기억은 과거와 소통하는 순간이다. 과거가 불리워지면, 현재는 과거를 따라가며 다시 그것을 형상화한다. 과거의 나에 대한 인정은 현재가 과거와 동일한 지평 위에 있음을 책임있게 인정하는 행위이다.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는 신실함은, 내 존재가 변해도, 생활세계가 변해도 지켜야 하는 어떤 것이다, 내 존재를 그동안 떠받치고 지탱해준 사람들에게 보답해야 하는 순간은 반드시 온다. 예수도 최소한의 감사를 나병환자 9명에게 바랬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