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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향유하는 법

jo_nghyuk 2025. 2. 6. 21:59

기억은 재현이다.

독일어로 기억은 현재화이다. 그때의 감각들, 감정들, 말들, 분위기, 환경이 이미지 뿐 아니라 들리는 것들과 느낌까지도 되살아난다. 특히 그리움의 감정은 그 기억을 더 농후하게 만드는 듯 하다. 내 기억을 재현해보자면 독일 학교 도서관 후문에는 회전문이 있고 카페테리아가 외부와 연결되어 있었다. 독일 학생들은 커피와 샐러드 등을 먹고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하거나 노트북으로 작업을 했다. 그때 마셨던 커피의 농도와 색을 기억한다. 가끔 스니커즈 등과 함께 먹곤 했다. 예나와 달리 튀빙엔 도서관 카페테리아에 처음 갔던 기억에는 생소함과 불안 그리고 어색함이 뒤섞인 감정이 있다. 그뒤로 튀빙엔을 갈 때는 그런 일이 없었다. 하이델베르크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는 친숙했고 뮌헨의 미술관으로 가는 길은 늘 기뻤다. 괴팅엔의 산책도 좋았고 베를린 미테 지구의 카페 순례는 늘 유쾌했다. 파리의 신학부로 걸어가는 길, 숙소의 좁은 계단을 올라 집의 창문을 열고 쉬던 기억, 네덜란드의 노란 기차를 타고 중앙역으로 나가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암스테르담의 소란한 풍경들, 함부르크의 붉은 창고가 늘어선 운하, 에르푸르트의 크라머브뤼케, 라이프치히의 거대한 건물들, 바이마르의 아기자기한 골목길, 예나의 바그너가쎄의 저녁… 모든 기억이 공재한다. 늘 사람들과 함께였고 아들과 아내와 함께였다.

사람은 그저 노동하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향유하는 존재이다. 나는 노동을 초월하여 향유하는 존재가 되고 싶은데 날개가 없는 존재처럼 망각하며 살고 있다.


기억은 현재화이고 기록은 그것을 돕는 매개이다. 오랜만에 기록해둔 수기들을 읽는데 정확한 지명과 사먹었던 빵의 가격까지 다 적혀 있어서 참 고마웠다. 나는 글을 쓰고자 할 때 행복감을 느끼곤 한다. 사람은 노동만 하는 존재가 아닌데 내 글은 노동에 가깝고 축제의 리듬이 많이 씻기워진 상태이다. 놔두면 열심히 하기만 하는 존재이다. 예수는 광야에서 혼자가 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과 함께 되었고, 또 다른 함께 함을 위해 떠날 수 있었다. 나는 혼자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 나타나야 한다. 나의 상상력은 일깨워진 지향성이다. 일깨워진 지향성은 무한의 지평으로 넘실기리며 나아간다. 여행했던 기억들을 다시 수기로 쓰며 내 기억은 상상의 이미지들을 가지고 논다. 그때 기억은 재현이 아니라 재형상화이다. 기록과 흔적을 가지고 유희를 벌이는 것이다.

때로는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노는 것이 더 본질적일 때가 있는듯 하다. 놀 줄 모르면 존재가 먹통이 된다. 서점의 숲에 가보고 영화관의 밤을 방문할 줄 알아야 설교자의 언어는 시인의 언어가 된다. 나는 아직도 시인이 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다른 이의 언어가 충분히 내 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반복적 언어는 구태적이고 확장성이 없다. 노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지평을 확장시킬 수 있겠는가?
주여 나의 지경을 넓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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