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모호성 (2)
저녁의 꼴라쥬
그 프랑스인이 내 이름을 저녁, 하고 부를 때 나는 모든 윤곽이 흐물흐물, 뭉개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그 프랑스 교수는 jo를 먼저 발음하고, ng가 자신의 나라에서 발화되는 방식으로 내 이름을 읽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라면 jong hyuk종혁하고 발음할 것을 그 프랑스인은 jo nghyuk줘뇨끄라고 읽었는데, jong에서의 ng가 뒤로 밀려나면서 hyuk에 붙어서 마치 avingon*아비뇽의 ng처럼 새로운 화학작용이 일어난 것이다.안경을 벗고 사물을 보듯이, 나와 너 사이에 모호하고 부드러운 것으로 가득할 때가 있다. 분명한 것들이 힘을 잃고 곤죽이 되고 으스러지고 비틀어지는 저녁의 시간이 올 때가 있다. 온갖 창조성으로 가득한 시간. ng가 jo 뒤에 붙어서 종이 되기도 하고, hyuk 앞에 ..
1여행의 기술에서 암스테르담을 언급하며 알랭 드 보통은 a 뒤에 a가 연이어 붙는 aa 의 이국성에 대해 호기심어린 어조로 이야기한다. 영어 교육을 받아온 한국인으로서 나에게는 독일어의 ei의 발음이 그러한 느낌을 주는데, ‘에이’라고 발음해야 할 것 같은데 ‘아이’라고 발음하는 순간, 음절들이 케미스트리를 이루는 일반적인 방향에 역회전이 걸린듯한 새로운 감각으로서의 쾌감이 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네덜란드에서는 i 다음에 j가 오게 될때 기묘하게 미끄러지며 ‘얘이’와 ‘예이’ 혹은 희뿌연 ‘야이’의 그물망 사이의 어딘가에 그 발음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나에게는 그 발음이 이렇게 복잡다단한 모호성의 긴장의 역학으로 다가오지만, 정작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냥 ij로서의 명료한 지점을 믿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