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계 3:14-22, 문 앞에 오신 예수님. 12.23 주일 설교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계 3:14-22, 문 앞에 오신 예수님. 12.23 주일 설교

jo_nghyuk 2012. 12. 21. 17:56

계 3:14-22

문 앞에 오신 예수님



지난 주일 새벽에 저는 특이한 것을 보았습니다. 아니, 특이하다고 하기보단 슬픈 것을 보았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보통 주일 6시 30분에서 7시 사이에 강남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이날은 조금 더 일찍 왔습니다.

6시에 강남대로에 도착했는데 너무 많은 젊은 청년들이 강남대로에 있었습니다. 이 새벽에 사람이 이렇게 많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들은 다 취해 있었습니다. 취해서 집에 가려고 모두 버스와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저는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었고, 그들은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 사람들은 오늘의 사람들이 아니라 어제의 사람들이 아닐까. 어제로부터 흘러들어와서 해가 뜨기 전에 빨리 집에 가야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새벽에 도착하면 맥도날드에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성경을 좀 보면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교회로 올라옵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 이 강남에 맥도날드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술에 취한 사람들입니다. 시끄럽게 떠들기도 하고, 하염없이 웃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슬펐습니다. 이들이 웃는 것이 정말 행복해서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문득 제가 우크라이나에 갔던 때가 생각이 났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 갔는데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중학생이고, 고등학생이고 맥주병을 손에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른들도 똑같았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라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지면서 이렇게 다들 술을 마시면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다고 했습니다. 일자리가 없어지면서 어른도 아이도 다 술을 들고 길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도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지금 기분이 좋은 것에 집중하고, 그러다가 덜컥 미혼모가 많아지고, 낙태율도 높아지고, 고아원의 고아들도 많아지고,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는 여전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술에 취해 있는데 그냥 그렇게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티비에서 승승장구를 보는데 혜민스님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참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말을 많이 해주시고 있었습니다. 어떤 갈등이 생길 때, 어떤 욕망이 생길 때, 힘든 생각이 생길 때, 그런 생각이 드는 자신을 “허락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개그맨 양상국이 차에 대한 욕심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혜민스님은 그럼 차를 사라고, 그리고 왜 자기가 차를 사고 싶은지를 이해해보라고, 그 속에는 차를 가짐으로 열등의식을 가리려고 하는 욕구가 있는 것이라고 충고해주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어쩌면 교회에서 해주지 못하는 말을, 스님이나 신부님들이 사람들에게 더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며 사람들을 치유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면, 혜민스님이 말하는 이것, 내 안에 있는 욕구와 갈망들을 “허락하라”라는 이 말은, 사실 기독교의 영성 훈련가들도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갈망이 생길 때, 그것들을 자꾸 통제하고 방어하려는 힘든 노력을 멈추고, 예수님 안에서 그것을 편안하게 내려놓는 것, 그것을 자신에 대한 허용으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그 방향이 예수님으로 향하지 않으면, 사랑으로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괴적인 방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혜민 스님이 말하는 대로 따라 하다 보면, 말은 다 맞지만, 그 안에 하나님에 대한 방향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다보면 그 끝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고 있는 행복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종교가 불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없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을 하나님이 없어도 행복한 것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러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통해서 요한 계시록이라는 책을 쓰게 하셨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다른 책이 아니라,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어느 교회는 잘 해서 칭찬 받는 교회가 있었지만 어느 교회는 칭찬과 꾸중을 같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교회는 꾸중만 받습니다. 

바로 꾸중만 받는 교회가 오늘 편지를 받는 이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교회를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너의 행위가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올바르게 살려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기는 하는데, 어중간하게 하고 있고, 그 어중간함을 하나님이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릴 것이다.”


어떤 것이 이렇게 미지근한 행위일까요?


저는 먼저는 내 힘으로 하는 사람이 미지근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 힘으로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하고,

내 힘으로 잘 살아 보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내 힘으로 좋은 일, 착한 일 많이 해보려고 하는


그러나 “내 힘으로” 한다고 했을 때, 그 동기를 예수님은 보십니다.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한 것이 아니라, 내 힘으로 했다. 이것은 예수님이 없어도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사람의 특징은 다른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다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만큼 했는데, 쟤는 이것도 못했어. 이건 쟤가 노력을 하지 않은 거야. 노력을 좀 하면 되는데.

그러나 이 마음은 교만입니다. 왜냐면, 내가 노력할 수 있는 힘도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아직 연약해서 그 힘을 낼 수 없는 상태인 것인데, 나는 은혜로 해놓고, 다른 사람에게는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선하기 때문에, 열심히 하다 보면 뭐든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렇게 선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미지근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무 것도 변화시키려는 열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냥 지금이 좋은 사람입니다. 

혜민 스님이 말하는 것, “무엇을 원하고, 욕망하든 허락하세요” 라는 말은 들으면서,

예수님이 말하는 것, “그러나 나를 따라오려면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와야 한다”는 말은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내가 죄를 지어도 용서하셨다”라는 말은 들으면서,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정말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가 죄를 짓는 것을 슬퍼하시고 싫어하신다”라는 말은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 역시 자신은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 문제가 없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은 이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 둘 다에 속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미지근한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는 굉장히 큰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정말 제 주위에 올바르게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다들 말은 잘 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진심으로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한다. 나는 타협하지 않겠다. 모든 것을 바치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렇게 말했던 사람들이 타협하고 무너지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에는 분노 비슷한 것이 있었습니다. 정말, 이 시대 가운데에는 “타협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 뿐인가? 다 “미지근할 수 밖에” 없는가?


그래서 저는 그동안 더 노력했습니다. 더 타협하지 않으려고 했고, 더 깨끗하려고 했고, 더 정직하려고 했고, 더 올곧으려고 했고, 더 기도를 많이, 더 말씀을 많이, 더 하나님 앞에 열심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남들이 다 넘어지는 유혹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이 시대와 싸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점점 더 외로워져 갔습니다. 저는 어느덧, 오히려 더 미지근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왜냐면, 이 성경에서 예수님이 교회에 말하듯, 내 스스로가 “풍족해서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조금 더 노력하고, 내가 조금 더 희생하고, 내가 더 죽고, 더 큰 믿음으로, 더 많은 희생으로, 내가, 내가, 내가! 할 수 있다는 이 생각이 오히려 예수님의 손을 잡고 한 발 한 발 걷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손을 놓고, 나 혼자 잘한다고 앞서서 달리는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번 주에 참 많이 울었습니다. 아, 내가 괴물이 되려고 하고 있었구나. 어떻게 보면 신앙 괴물이 되려고 하고 있었구나. 

어느덧 제 안에 인간적인 울음이 있을 때도, 저는 그것을 “지금 때가 어느 땐데, 나보다 더 힘든 북한 사람들도 있고, 아프리카 사람들도 있고, 장애인들도 있고, 노동조합원 피해자들도 있는데, 내가 지금 우는 것은 사치다. 울 시간도 아깝다”라고 생각하는 미지근한 괴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의 열심의 동기는 어느덧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 동기는 순전히 영웅심이었습니다. 모두 무너져 있으니, 나라도 일어서자.

모두 빛을 잃었으니, 나라도 빛을 내자. 모두 타협하고 있으니, 나라도 타협하지 말자.

어렸을 때부터 정의감에 대한 울분이 예수님과 손잡고 걸어야 하는 것을 손을 뿌리치고 앞서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정말 빛만 있었을까요? 제 삶에 정말 타협이, 죄가 없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행동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더 미지근하게 되는 짓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요한을 통해 우리에게도 말합니다.

너는 지금 만족스럽다고 말하지만, 아니다.

너의 실상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상태이다.

네가 지금 이렇게 불쌍한 모습인 것을 발견하여라.


이것은 혜민 스님이 말하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스님은 그 모든 욕구와 갈망을 허락하라, 고 말하면서 모든 것에 대해 자유를 주면서 인간을 초월하게 하지만


예수님은, 갈망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갈망하고

욕망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욕망하는 비참한 너를 직면하라! 고 꾸짖고 계십니다.

전혀 괜찮지 않다! 라고 우리에게 소리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괜찮다! 라고 말하는 것, 하나도 괜찮은 것이 아니다! 그것이 예수의 보혈로 용서함 받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도 괜찮을 수가 없으며 오히려 끔찍하고 더러운 죄일 뿐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죄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반복해서 용서하십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래서 괜찮아. 라고 생각하며 “죄를 죄로 생각하지 않고”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짓는다면 이것은 혜민스님이 말하는 것과 다를 바도 없고, 그보다 못한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죄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 아파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지금 문 밖에 서 계신 것이지,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진정 죄에 대해 아파하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나에 대해 진정으로 아파하고 계시냔 말입니다.

이렇게 죄를 싫어하는 데도, 죽을 듯이 노력으로 이겨내려 해도 안되는 나에 대해 정말로 아파하고 낙심할 정도로 힘들어하고 신음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눈이 먼 것입니다. 벌거벗은 것이고,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여러분, 회개 이전에 여러분은 정말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있습니까?

정말 열심을 내어서 죄랑 싸워보고 그리고 넘어져서 회개를 하는 것입니까?

뜨거워지려고 갖은 노력을 해보고, 그게 안되는 차가운 나를 회개하고 계십니까?


죄와 싸우지 않고, 타협하고, 죄를 회개하는 사람, 이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가장 미지근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있다면, 이 시간 함께 회개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 보혈로 그의 죄를 덮으시고, 씻으시고, 깨끗한 옷을 입히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제대로 보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문 앞에 오셨습니다. 문 밖에서 여러분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 줄래? 그러면 내가 너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단다. 

예수님은 절대로 함부로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삶의 영역은 어디입니까?

예수님이 아직 들어오시지 못한 그 방은 어디입니까?

문이 굳세게 잠긴, 그 방문을 예수님이 두드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지금 문 앞에 계십니다. 문을 여는 사람은, 자신이 계속해서 실패했던 그 영역을, 이제 예수님과 함께 “이기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로 들어가면, 함께 이길 것이다. 너는 이길 것이다. 귀가 있는 사람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십시오. 

당신이 가장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그 삶의 영역의 그 방의 닫힌 문을, 이제 열어보십시오.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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