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주일 설교, 성령을 따라 산책하십시오.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주일 설교, 성령을 따라 산책하십시오.

jo_nghyuk 2013. 2. 2. 17:06

갈라디아서 5:16-24

성령을 따라 산책하십시오.


여러분은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저는 매우 좋아합니다. 저는 찬양을 들으며 걷는 것을 참 좋아하는데, 찬양을 부르다가 감동이 많이 오면 버스를 타지 않고 집으로 걸어올 때가 자주 있습니다. 물론 세 정거장 거리밖에 되지 않는데요. 오면서 나무들을 보고, 별들을 보고, 사람들을 보고, 또 저희 집 앞에는 중랑천이 있어서 다리를 건너면서 강을 보기도 하고, 조깅하는 사람들을 보고, 바람을 쐬면서 천천히 그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때쯤 되면 집에서 문자가 옵니다. 

‘도착할 때가 됐는데 안오고 어디에요?’


날씨가 추운 겨울임에도, 저는 여전히 산책을 하며 집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별히 찬양을 즐겁게 하면서 오면, 추운 것도 어느 정도 즐겁게 참을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제가 산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쁘게 목적지를 향해서 버스를 타고 내달리면 2-3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를 굳이 15분동안 걸어가는 이유는 ‘그저 빠르게 가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굉장히 많은 부분 ‘빠르게 가는 것’에 조건을 두고 이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간표를 짜고, 계획된 시간 내에 깔끔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무언가 불안하게 되지요. 


제가 산책을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전도사로 부르심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먼저 하신 말씀이 ‘나와 함께 산책하자’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산책을 좋아하시는 것 아십니까? 창세기 3:8에 보면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거니시면서 날마다 산책을 하셨다고 나옵니다. 자신이 지으신 자연을 보시고, 사람을 보시면서 흐뭇하게 산책하시는 하나님을 상상하면 저는 참 좋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산책하는 것을 더욱 즐거워하십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산책을 하지? 여러분은 궁금해하실 수도 있는데요. 제가 오늘 하나님과 산책하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갈라디아서 5:16에는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많이 무너지는 죄의 유혹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제가 이 구절을 헬라어 번역을 하면서 다시 해석해보았더니, 색다른 번역이 되더군요.

“여러분은 성령으로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렇게 되면 이 길의 끝이 육체의 욕심으로 끝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이 욕심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은 끝이 없이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 무슨 물건을 사고 싶어서 그것을 사면, 만족은 잠깐이고, 또 다른 물건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또는, 어떤 만족을 누리고 싶어서 어떤 즐거움을 찾으면, 그 즐거움이 주는 만족도 잠깐이고, 또 다른 즐거움을 우리는 원하게 됩니다. 며칠 전에 뉴스를 보는데 10대 학생들이 휴대폰 영업점을 밤마다 털어서 2억원 가량을 절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학생들이 번 돈을 다 유흥비로 썼다는 뉴스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결국 휴대폰 집을 털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것이 “즐겁게 노는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항상 어떤 욕구를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갈망이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는 매우 힘들어 합니다. 그리고 그 갈망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욕구이든, 먹는 것, 입는 것, 노는 것, 쉬는 것, 사랑하는 것, 그리고 성적인 욕구까지 우리는 그러한 욕구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이 휴대폰 털이범 학생들도 이러한 욕구를 채우고 싶어서 휴대폰 집을 털었겠지요. 


제가 번역한 5:16을 다시 한번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으로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렇게 되면 이 길의 끝이 육체의 욕심으로 끝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극단적인 예이지만, 휴대폰 털이범 학생들의 예를 들어서 우리의 욕구대로만 살 때, 그 길의 끝이 육체의 욕심이며 죄라는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굳이 그들처럼 휴대폰 집을 털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욕심의 길의 끝이 항상 죄라는 것을 우리의 인생을 통해 이미 잘 보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안에 있는 갈망, 이 욕구는 잘못된 것이고, 억압하고, 억누르고, 제어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라는 것이 제 대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전도사로 부르실 때에 “일단 산책하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감상적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제 안에 큰 갈망과 욕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작가가 되고, 교수가 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더 문학을 공부하고, 글을 쓰고,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은 큰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원에 가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문학을 하고 싶은 갈망이 있는 저에게 “산책하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번째로, 산책은, “목적지”에 빠르게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어떻게 가느냐”의 과정에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지에 늦게 도착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도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빠르게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느냐, 어떤 길로 가고, 그 길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느냐, 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두번째로, 산책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가는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어느 목적지에 빠르게 도착해서 목표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어떤 사람으로 다시 빚어져 가는가, 나라는 사람에 더 의미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책은, 목적이 없이 헤매는 방황도 아니고, 목적만을 목표로 두고 달리는 단거리 경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방황과 경주 그 사이에 있는 어떤 것과 같습니다. 때로는 헤매기도 하고, 길을 잃어보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디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목적을 향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산책을 하게 될 때 가장 위험한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약, 나 혼자서 그 길을 걸어간다면, 애초의 목적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내 편한대로 새롭게 목적을 바꾸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길이 힘들면,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 되지, 더 편한 길로, 내가 가고 싶은대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는 “성령을 따라”, “성령님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산책한다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7을 읽어볼까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함”을 주십니다. “갈망”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질서대로, 적당하게, 균형있게 사용하도록 주셨습니다. 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에게는 그것을 적당하게 사용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죄에 대한 유혹이 있고, 죄를 향하는 경향이 우리 몸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 자유롭고 싶습니다. 자유로운 삶을 우리 모두는 갈망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되지 않는 것은 우리는 여전히 죄의 유혹과 방해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성령, 즉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육체가 서로 대적하고 있다, 고 말합니다.

육체는 적당한 욕구가 아니라 더 큰 욕심과 방탕함을 원합니다.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지요. 

성령님, 즉 하나님은 방탕함이 아니라 질서의 자유, 깨끗하고 거룩한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길 원합니다.


그래서 18절에서 말하듯, 성령의 인도하심을 우리가 받게 되면,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게 된다, 고

말합니다. 율법은, 계명, 법을 말합니다. 이 법은 죄를 짓는 사람을 처벌하고, 심한 죄는 죽이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렸듯, 우리는 죄를 사랑하는 경향이 있고, 우리의 육체는 죄의 유혹에 약한 정도가 아니라, 그 유혹을 향해 달려가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죄로 인해 넘어지고, 죄인이 되고, 율법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육체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좋아하는 일들을 성경은 말합니다.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얼핏 보면,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싫어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가 되었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도 여러분을 보지 않습니다. 내가 엄청난 부자가 되면, 그냥 나를 위해서 마음껏 쓸 수 있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내가 부담 안될 정도의 적은 돈을 던져주고, 누구도 나를 감시하지 않아서 음란한 영상을 마음껏 볼 수 있고,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고, 화가 나면 실컷 욕할 수 있고, 힘이 있으면 때려서 제압할 수 있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맘에 안들고 나를 힘들게 하면, 나에게 좋은 말, 편한 말만 하는 신을 따로 믿을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나 예쁘고 잘 생긴 사람과 결혼할 수 있으면 결혼하고, 그러다 질리면 이혼하고, 또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있으면 또 결혼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정말 여러분의 깊은 마음 가운데에서 이러한 욕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나요?

실제로 우리가 그러한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환경이 받쳐주지 않아서일 뿐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유명인사가 되고, 연예인이 되고, 힘이 생기면, 더 타락하고 죄에 빠지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서는 이러한 죄악들이 전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는 온갖 탐욕과 살인과 간음과 우상숭배와 원수 맺는 것과 싸움과 시기와 밝힘과 술취함과 방탕함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목적지를 향해 온전하게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끝까지 목표를 향해 산책하며 건강하게 걸어가겠습니까? 차라리 목적지를 바꾸고 편하게 살면서, 길을 잃어버린 채로 방탕하게 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방탕하게 사는 것이 진정 자유롭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우리를 진정으로, 참된 의미로 자유케 해주실 하나님이 옆에서 함께 산책해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 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로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게 되면,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내 갈망이 진정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나는 길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에 처한다는 걱정이 우리 안에 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가장 깊은 갈망은 무엇입니까? 그냥 솔직하게 자신의 안에 있는 그 욕구를 들여다보십시오. 거기에서 정직함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욕구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져가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욕구가 무엇이든, 그것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여러분을 받으시고, 품으심을 믿으셔도 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욕구와 갈망을, 하나님만이 정화시켜 주십니다.

욕구도 잘못된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화된 욕구가 있습니다. 잘못된 욕구는 내 방식대로, 나만을 위해서, 내 쾌락만을 채우기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육체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께서 정화시켜 주실 때, 그 욕구는, 그 갈망은 거룩한 것이 되고, 나를 살리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에너지와 열정으로 변화됩니다. 


그렇게 변화된 욕구를 22절과 23절에서 말합니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갈망을 누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사랑과 기쁨과, 평화, 오래 참음, 자비, 부드러움, 충성, 따뜻함, 절제.


여러분들이 이러한 것들을 원하게 성령님, 하나님께서 바꾸어주십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오직 “하나님과 함께 산책”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 목적지로 빠르게 달려간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 혼자 헤매인다고 해서 찾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걸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천천히 산책하셔야 합니다.


24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말합니다.

욕구나 갈망이 아니라, 잘못된 욕구, 정욕과 탐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육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잘못된 것들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육체의 죄악된 것들을 이미 못박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죄가 이미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탐욕이 욕심이 죄에 대한 잘못된 욕구가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것을 믿는 지점이 산책로의 출발점입니다. 


걷다가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또 죄를 지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걷기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넘어져서 울 때도, 외로워져서 두려울 때도, 

하나님이 옆에 계신 것을 믿는 것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느리지만, 느리더라도, 여러분은 온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걸었던 이 과정이 너무도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산책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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