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로마서 7-8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로마서 7-8장

jo_nghyuk 2013. 2. 16. 11:53
두려움이 먼저 사라져야 한다. 이 두려움은 율법에서 온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를 질식시키고 모든 아름다운 가능성도 함께 박탈시킨다.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두려움을 피해 숨으려 한다. 그러나 의지만으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으며 오히려 로마서 7장의 말씀처럼 죄 아래 팔리는 것을 본다. 무엇이 죄인지를 알게 되면 더더욱 그 죄를 피하면서도 그 죄 아래 팔리게 되는 모순의 존재가 인간이다. 
로마서 8장의 대전환처럼 우리에게는 힘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항복하는 것이 생명을 향한 열쇠가 되어준다. 항복은 7장까지의 흐름처럼 내가 '어느 정도' 죄인이 아니라 '뼛 속까지 더러운' 죄인이며 그 모든 실행되지 않은 죄가 이미 가능태로서 내 안에 죄다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미 살인이 내 안에 있고, 간음이 내 안에 있으며, 탐욕이 있고, 우상숭배가 있고, 성내는 것과, 모략하는 이 모든 죄가 "이미" 내 안에 죄다 있음을, "총괄적인"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항복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쪽짜리 항복이다. 힘을 빼더라도, 우리는 어느 쪽으로 힘을 뺄지 결정할 수 있다. 힘을 빼는 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어떤 의지도 노력도 마음도 원함도 없음을 인정하는 "자기 포기"이다. 그러나 이 자기 포기가 죄를 향할 것인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는 믿음을 향할 것인지를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항복은 "오호라"라는 곤고한 탄식과 "그러므로 이제"라는 눈물겨운 위로부터의 사랑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대전환이다. 오호라, 라는 탄식만으로는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로마서 8장에서처럼,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야 하며, 성령으로 육신을 죽이는 데까지 "그가 하시도록" 거기까지 항복해야 한다. 삶의 모든 시작과 끝지점에 어떤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가 은혜를 앞설 수 없다. 모든 노력과 의지는 이 항복에서부터 비롯된 감사의 응답이며 헌납이다. 

여전히 나는 할 수 없음을, 그러나 이 먼 길을 성령께서 빛을 비추시고, 길을 만드셔서 불가능한 것을 할 수 있게 하심을, 우리는 "믿음"으로 항복해야 한다. 믿기 이전에 항복이 있다. 그리고 항복은 믿음이 온 후로 기쁨의 응답으로 변한다. 응답은 여전히 항복이다. 그러나 항복은 이제 자유의 응답이다. 항복은 이제 죄로부터,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성령은 자유의 영이다. 

자, 이제 두려움이 사라진다. 성령은 자유의 영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항복"은 응답을 넘어서 "사랑"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응답은 그를 향한 사랑에서 근거해야 한다. 이것은 더 큰 효율적인 인터플레이를 위해 사랑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만이 하나님을 아는 목적이고, 사랑만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으로 율법이 말하는 죄를 피하지 않는다. 우리는 두려움이 사라진 뒤에도 조심한다. 이 조심함은 두려움에서 온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경각심에서 오는 "지혜"이다. 두려움은 사랑 안에 사라진다. 그러나 조심하지 않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잠언이 말하듯 그가 "지혜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장 안에서 두려워하지 않지만, 여전히 조심해야 한다. 이 조심한다는 것은, 우리는 자유를 누리면서도, 여전히 "전적으로 그를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그 의존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가 아니라, 순수한 사랑의 의탁인 동시에, 여전히 성령의 능력장 바깥에 상존하고 있을 죄와 죽음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조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우리는 순종이라 부른다. 
성령은 우리에게 물고기를 주지만, 그 능력의 장 밖에서 사탄은 뱀을 들고 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를 보호하고 있으며,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조심해야 한다. 조심하면서, "오로지 순종"하고 그만 따라가는 것에만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는 사랑의 응답을 해야 한다. 
이 사랑의 응답은 마치 신랑과 함께 조금씩 춤을 추는 신부의 스텝처럼 조심스럽고, 동시에 수줍다. 그리고 기쁘다. 그리고 신랑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계속 기쁘게 춤을 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고 있다.
신랑은 떡을 주지만, 사탄은 계속해서 그것을 돌로 바꾸길 원한다. 우리는 여전히 신랑의 보호 아래 신랑과 춤을 추는 동시에, 외부의 사탄으로부터 다른 춤의 유혹과 제의를 받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자유가 온 이래로, 죄를 짓는 것은 이제 팔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자유가 왔기 때문에, 이제는 변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깨어서" "조심하라"고 말한다. 두려움은 사랑이 몰아냈다. 그리고 우리는 신랑에 대한 사랑의 응답으로 두려움이 있던 자리에, 어수룩한 방종이 아니라, 지혜로운 근신함을 두어야 한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