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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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머뭇, 머뭇

jo_nghyuk 2013. 5. 13. 13:08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 진리의 영은 자유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자유 가운데서 신비롭게도, "자발적으로" 우리는 희생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누구도 십자가를 강압적으로 메고 갈 수 없다. 반대로 어느 그리스도인도 십자가를 버리고 도망갈 수 없다. 가장 불쌍한 것은 이 가운데 끼어 탄식하는 이들이다. 누구도 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못한다. 사람이야말로 이 자발성을 질식시키는 데에 선수이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이에게는 한병철의 표현대로 '머뭇거림'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머뭇거림의 시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허락하신 위대한 기다림의 시간이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시간이다. 너는 참으로 결정하기 위해서 머뭇거린다. 네 안에서 진실된 것이 만들어지기까지 기다리는 지도 모른다. 그 이전의 결정은 기계적이며, 뜨거운 가슴이 동의하지 않은 결정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의지가 앞서지 못하게 하라. 저 매혹적인 효율성에 스스로를 가속화시키지 말라. 

진정 자유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개념 이상의 것이다. 그 자유는 일차적인 자유이며 유아적인 자유이다. 그러나 이 자유 또한 주어졌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 단계를 너무 빠르게 건너뛴다. 마치 이 단계가 없는 것처럼 우리는 이 단계를 황급히 벗어나려고 한다. 그것은 튜토리얼을 무시한채 게임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너희는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지 말고,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몰트만의 말대로 자유는 사랑이라는 다음 단계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정 뿐만은 아니다. 자유는 계속해서 우리 안에 숨쉬고 있다. 

그러나 이 상태는 진공의 무중력과 같아서 우리는 어디로나 갈 수 있는 동시에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실존을 깨닫게 된다.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자의적으로 스스로에게 부과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 세계의 의미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내가 의미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면 그만한 허무성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리는 다시 중심추를 잡아야 하는데, 다행히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는 그 중심추가 없다. 갑자기 우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것은 자유의 파산과도 같으며, 자아의 파국과도 같다. 여전히 너는 기로에 있다. 너는 거부할 용의로 가득하고,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괴로움과 기쁨이 함께 하는 장소이다. 괴로움은 나 혼자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고 타인에게 그 기쁨을 주기 위해서는 그만큼 내가 희생해야 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어떤 기쁨도 대가가 없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은 없다. 고통스러웠던만큼 기쁘고, 기뻤던 만큼 그것을 상실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예수는 그러므로 겟세마네의 동산에서 거부할 용의를 드러내신다. 만일 할 수 있으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그러나 그가 거부의 용의로 가득함에도 그것을 끌어안게 하는 힘이 있다. 그 힘도 이 하나 뿐이다. 그것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사랑이다. 사랑하는 이는 자신이 거부하던 모든 것을 기꺼이 끌어안는다. 사랑은 모든 중력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사랑은 끌어당길 뿐 아니라 끌어안는다. 
모든 평범한 이들은 아버지가 되어가면서 이 고통을 직면한다. 그리고 자녀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끌어안는다. 이전의 그라면 하지 않았을 일들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의지가 아니라 의지에 선행하며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사랑이다. 

다시 내 앞에 십자가가 있다. 그리고 다시 내 안에 자유함이 있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무관심한 불순종의 편안함보다 사랑으로 고뇌하고 괴로워하고 몸부림치는 불편함, 이것은 결코 시간낭비가 아니라 그 앞에서 머뭇거리는 인간의 실존일 따름이다. 차라리 이미 건너간 자들은 더욱 편안하다. 괴로운 것은 여전히 이편에서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들이다. 그것을 사랑으로 끌어안기 위해 이 모든 이들이 머뭇머뭇, 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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