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10/29 설교) 내 영혼아!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10/29 설교) 내 영혼아!

jo_nghyuk 2013. 10. 3. 12:41

시편 42편

“내 영혼아!”


교리: 신론

주제: 고난 가운데에서 우리의 기쁨의 소망은 하나님만이 되심을 다시 붙잡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기쁨이 되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찾자.

이미지: 행복과 기쁨

미션: 아침 묵상


(도입부)


우리는 우리의 상황이 우리가 통제할 수 없게 힘들게 돌아갈 때 우리의 약점이 더 많이, 쉽게 드러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감당할 능력이 거의 없고, 상황은 갈수록 거센 파도처럼 우리를 위협합니다. 그 폭풍우와 같은 상황들 앞에 우리의 모습은 강하고 큰 나무가 아니라, 약하디 약한 갈대와도 같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힘겨운 상황들 가운데에서, 버티기도 바쁜데, 우리는 우리의 약점들이 더 많이 드러나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이 시험과 고난 가운데에서, 우리의 마음은 자꾸 낙심되어져만 갑니다.

그리고 아마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 더 강해지지 못했을까, 왜 더 인내하지 못했을까”


오늘 시편 42편을 시편 기자가 쓸 때에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멸망한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의 집들이 파괴되고, 가진 재산들, 소와 양, 가족들까지 다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던 성전도 파괴되었습니다.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던 것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원인은 단 하나, 그들이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사랑했던 다른 모든 것들을 잃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시편 42편은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다시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마음으로 쓰여진 노래입니다. 시편 42편 1절 위에 이렇게 쓰여있죠? 고라 자손의 노래, 마스길.

마스길이라는 말은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이 시편이 노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 중 누군가가 너무도 힘든 상황에 놓여 있다면, 그리고 연약하고 피곤한 몸과 마음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을 보며 불안하고 초조해하고 있다면, 오늘 이 노래가 주는 교훈이 우리들에게 위로와 소망이 되길 원합니다.


(1)


사실 우리가 아는 “목마른 사슴”이라는 찬양은 이 시편 42편의 가사들로 만든 찬양입니다. 

사실 1절에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라는 문장은 히브리어 원어로는 “사슴이 헐떡이면서 시냇가의 물을 찾듯이, 내 영혼도 이렇게 헐떡이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2절에 “내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하나니”라는 말도, “하나님에게 목마릅니다”라고 해석되어야 합니다.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진 것을 다 잃었는데, 눈에 보이는 행복과 소망들을 다 빼앗겼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에게만 목마릅니다”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전도사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일주일 내내 저의 시간표와 공부량은 고등학생과 맞먹는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간중간 만나야 할 사람도, 보살펴주고 챙겨주어야 할 사람도 참 많습니다. 이번 학기는 이상하게 조장, 반장 비슷한 것을 자꾸 맡게 됩니다. 내 것만 잘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부족하면 그것을 도와주고 함께 이끌어주어야 하는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러다 보니, 저에게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매우 귀중하게 느껴집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도 이런저런 일을 바쁘게 처리하고 수요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서둘러 2호선 지하철을 타고 교회로 왔습니다. 제가 서둘러서 오는 이유는 사람들이 붐비는 러쉬아워를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꽉 찬 지하철 안에 뭉개져서 오게되면, 책을 읽을 공간도, 음악을 들을 여유도, 없습니다. 그리고 피로는 두배 세배로 더 많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보통 교육관 중고등부실에 와서 혼자 3-40분 시간을 보내다가 수요예배에 들어갑니다. 저는 교육관 2층 복도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보통은 여기서 구름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그 날은 좀 다르게, 1층 청년부실에 가보았습니다. 청년부실에는 큰 유리로 된 창이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 교회의 작은 정원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바닥에 앉아서 조용히 음악을 들으면서 풀들을 보면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이 초록 풀들을 보면서 휴식을 취하는데, 평소에 2층 중고등부실에 앉아서 쉬던 것보다 훨씬 큰 위로와 쉼이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는 느꼈습니다. ‘아, 이 초록색 풀들이, 이 작고 조용한 생명들이 나에게 쉼이 되고, 위로가 되는구나. 내가 필요한 쉼은 생명이고, 그 생명이 주는 위로였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쉼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참되게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2)


오늘 시편 42편의 한 이스라엘 시인은, 그 폭풍과도 같은 상황 속에서, 자신이 지치고 힘들고 연약할 때도 오직 위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모든 생명의 주인이시다! 내가 그분에게로 다시 돌아갈때 나는 다시 그분이 주시는 생명으로, 아니, 생명이신 그분 자체로 인해서 회복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어디 계신데 이렇게 우리 집이 망하고 가축을 빼앗기고 나라를 빼앗기게 하시냐?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런 일들이 벌어지겠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이런 동일한 질문들을 사람들에게 받지는 않으십니까? 특별히 학생들은 공부하느라 지치고 바쁜 이 시간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하나님이 공부 잘 하게 해주시냐?”라는 공격적인 도전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직장인이신 선생님들께서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하나님을 잘 믿으면 좋은 직장 다니면서 돈 많이 벌게 해주시냐?”라는 질문의 도전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시편 42편 8절이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냐”는 것은 사실 질문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생명의 주인이시고, 생명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살아계신 생명의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실 수 있습니다. 왜냐면 “생명”만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고, 회복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아니, 하나님이 생명이시다면, 그 생명의 근원이시다면, 하나님만이 우리가 돌아갈 참된 위로입니다. 






저는 작년 여름에 일본 교토에 다녀왔습니다. 교토에는 대나무 숲이 유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교토의 대나무 숲에 가서 쉼을 누리고 오려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토에 있는 삼일동안, 저는 제가 원하던 쉼을 충분히 누린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토라는 이 도시는 고독함이 더 많은 곳입니다. 저는 쉼이나 위로보다는, 고독함과 외로움을 더 많이 느꼈습니다. 





마지막 3일째날 아침, 저는 산책을 하다가 한 작은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커피와 토스트를 시키고, 성경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3일동안, 쉼과 위로를 얻고 싶어서 교토에 오고, 숲에 왔는데 내가 그곳에서 얻지 못했던 참된 쉼과 위로가, 이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것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즐거움과, 위로와, 쉼을 찾고, 때로 숲이 위로를 해주고, 영화가 위로를 해주고, 게임이 위로를 해주고, 운동이 위로를 해주고, 사람이 위로를 해준다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찾지만, 사실 그 모든 위로들이 “생명이신” 하나님을 통해서 오는 위로가 아니라면 사람에게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위로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참된 위로에는 깊은 휴식이 있습니다. 잠을 많이 자도, 술을 아무리 마셔도, 게임을 아무리 많이 해도, 티비를 신나게 보고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아도, 참된 위로는 그곳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위로는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하나님의 생명만이 우리를 참되게 쉬게 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회복시키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줍니다. 


(3)


오늘 이 이스라엘 시인의 노래 속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사람들은 이 고통 중에 나에게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하나님은 안 계신다 라고 나를 조롱하지만, 내 영혼도 낙심하며 내 마음도 불안해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하나님에게만 나의 소망이 있다. 하나님이 나타나 나를 도우실 것을 믿는다.”


오늘 5절과 11절이 같은 구절입니다. 이 시는 노래라고 했지요? 5절과 11절은 후렴과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반복해서 부른다는 것은, 그 고백이 나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11절을 한번 같이 읽어보시지 않겠습니까? 


11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5절과 같지만 다른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11절에서는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라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힘든 시간들이 올 때마다, 우리도 이렇게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하나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하나님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 내 영혼아! 낙심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아라! 나의 하나님을 소망하고 바라보아라! 사슴이 헐떡이며 시냇가의 물을 찾듯이, 내 영혼아! 너에게 참된 위로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을 찾고 바랄지어다!”


(미션)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아침마다 이렇게 우리에게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을 찾아봅시다.

다시 한번 성경책을 폅시다. 다시 한번 묵상 책을 펼칩시다. 

이 세상의 다른 것으로부터 위로를 찾기 이전에, 우리의 영혼에 참된 위로가 되시는 하나님을 아침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가의 물을 찾듯이, 말씀 속에서 찾읍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그 아침에 나타나셔서 불안한 여러분의 마음을, 목마른 여러분의 영혼을, 지친 육신을 위로하시고, 쉬게 하시고, 회복시키시며 다시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이번 한주, 여러분에게 드리는 작은 미션은 이것입니다. 아침에 성경책을 펴십시오. 목이 마를 때마다,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불안하고, 낙심한 영혼에게 외치십시오.

“내 영혼아! 어찌하며 낙심하며 불안해 하느냐!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나님은 생명이 되신다!”


하나님이 반드시 나타나셔서 여러분들을 도우실 것입니다.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때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여러분의 영혼에게 이렇게 외치십시오.

“내 영혼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분은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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