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영혼의 허리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영혼의 허리

jo_nghyuk 2015. 10. 27. 10:58

오늘은 출근길에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래서 오늘은 자전거를 집에 매어두고 왔다. 비오는 날 진돌이를 집에 매어두고 나갔다 오면, 누런 털 냄새가 그렇게 진동하곤 했다. (냄새가 진동한다는 표현은 참 문학적이다. 냄새는 특유의 파장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허리가 아팠다. 누워서 책을 읽곤 하는 나쁜 습관 때문인 것 같다. 어제는 누워서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과 새물결플러스에서 나온<케노시스 창조 이론>의 홈스 롤스턴3세의 '비움과 자연' 부분을 읽었다. 앉아서는 키에르케고르와 레비나스, 성경을 읽었고, <생의 한가운데>를 마침내 다 읽었다. 키에르케고르는 무구함이 불안을 만나게 되면서 자유를 체험하게 된다고 말했고, <케노시스 창조이론>에서의 홈스 롤스턴은 '자발성'이라는 것, '자유'라는 것이 도덕과 연계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도덕을 가지는 것은 인간 뿐인데, 그 도덕을 가지고 선의 체계를 이루며 성장할 수도 있고, 악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칸트가 자유와 도덕을 왜 연관시켰는지, 최대의 자유가 어째서 도덕의 준칙을 넘어 법칙과 연계된다고 보았는지가 이해가 된다. 그래서 자유주의와 윤리는 자발적인 주체가 아니면 창발되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이 깊은 국민성을 만든다고 보았고, 그 불안이 혼란을 조장한다고 믿는 것은 산문적인 어리석음이라고 말한다) 

<생의 한가운데>에서의 니나는 무구한 아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에 슈타인 박사는 불안한 성인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슈타인은 니나를 동경하고, 니나는 슈타인을 멀리 하면서도 매혹을 느끼고, 때로는 의지하기도 하는 양면성을 보인다. 실로 키에르케고르가 아이만이 무구함을 가지며, 모험을 하며, 불안에 매혹되면서도 불안으로부터 숨는다고 묘사했던 것이 이 소설에서 두 인물의 양태를 통해 적실하게 묘사되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니나는 여전한 무구함을 지니고 있으며, 불안을 옆에 두고, 그것을 직면하며, 대담하게 잘못된 국가에 저항하며, 감옥에 들어갈지언정 그 생동감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반면에 슈타인은 그토록 거부했던 나치당의 위협에 굴복하여 당에 가입하고 만다. (물론 그것은 슈타인의 본심이 아니다.여기에 그의 연약과 비겁이 맞물려 있다. 니나와 슈타인을 구분하는 것은 '용기'라고 보고 싶은데, 이것은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가 '용기'를 통해 인간의 에너지 파장이 부정성에서 긍정성으로, 무력이나 분노에서 사랑이나 감사로 전환된다고 말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최근에 읽는 책들은 대부분 '불안'과 '자유', '시간성'과 '용기' 의 테마로 중첩되고 있다. 진돌이도 죽었고, 나의 아버지도 그러하다.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후에 나는 시간성의 문제에 대해서 천착하고 있는 중이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 리쾨르와 아우구스티누스, 베르그송과 후설, 칸트 등의 철학자들이 문제의 핵에서 치열한 담론을 벌이고 있는데, 나의 석사 논문에 다(충실하게) 들어가줄지가 의문이다. 생명은 언제나 분투함으로 목표를 이루어간다고 과학자들이 말했던가. 자기 세대에 이루지 못한 것을 정보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공유함으로 결국은 이루려 하는 것이 생명의 방식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어떤 과업이 나에게는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평생의 사업을 보았을 때, 그것은 필경 가난하고 억압된, 슬프고 외로운 이들을 향할 수밖에 없다.   

문득 아침에 인상을 찌푸리고 우산을 피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날씨 때문인지, 지나가는 이들의 인상도 오늘따라 낯설고 무서웠다. 사람이 참 간사한 것이, 전날 밤 기도하며 오늘도 살아 있음에 벌벌 떨며 감사를 드려놓고서는, 아침에 출근길에서 인상을 팍 쓰고 앉아 있다. (영혼은 엎어져 누워 있다. 영혼의 자세가 나쁘니 영혼의 허리도 아플 것이다. 몸은 오죽하랴.)  

비가 그치고 볕이 들자 새들이 노래하는 소리가 창문 너머 숲에서 들려온다. 감사하자. 감사하며 살자.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