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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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여 어떻게 살 것인가

jo_nghyuk 2015. 11. 5. 10:52

어제 밤에 돌아오는 길에 중고서점에서 히라이켄의 중고음반을 두장 구매했다. <Life is...>라는 타이틀의 음반이었는데 리스트의 마지막에 <할아버지의 낡고 큰 시계>라는 곡이 있었다. 동요 곡이라 귀에 익은 멜로디를 팔세토 창법으로 부르니 사뭇 곡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할아버지만큼이나 오래된 100년 된 시계. 이제는 하늘에 올라간 할아버지. 그리고 이 시계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는 노랫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서 피안의 세계에 대해 새롭게 눈이 열리게 되는 듯 하다. 단지 이 땅의 일이 전부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우리는 그것을 생명의 탄생,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직관적으로, 그리고 '원본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본질직관은 어느정도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생명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라고 인간은 묻는다. 만약 죽음이 단순히 소멸이라면 생명은 운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우리는 유물론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그러나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어딘가로 회귀하는 것이다.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그렇다면 생명은 단순히 발생한 우연적 사건이 아니라 어딘가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탄생과 죽음. 이 둘이 지시하는 것은 삶은 우리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같이 쥘 수 없는 것이며 단지 직관의 흐름이나 체험의 흐름을 통해서 '함께 함'이라는 사실이 아닐런지. 우리는 생을 함께 할 뿐이다. 할아버지와 낡고 큰 시계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이전 세대'의 '다음 세대'였던 '지금의 세대'만이 움직인다. 대체 현재라는 것은 무엇인가. 현재만이 생동한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 안에서 기억과 기대라는 형태로 존재하지만 생동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인간의 시간의 한계성이 드러난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를 선물present이라고도 부른다. 덧없는 시간성이 허무함에 삼켜지지 않기 위해, 인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괄하는 '영원'을 갈구한다. '영원한 현재'를 지향할 것인가, 무성에 삼켜지는 '과거의 현재'로 내려갈 것인가. (그것은 실존론적 결단과도, 또 구속사와도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희망의 엑소더스'에 대한 믿음과 맞물려 있다) '시간의 충만'이 지금의 세대의 과제이다. 온전히 살라. 주어진 생을 충실히 살라. 개미에게 부지런함, 예비함을 배우라. 무엇보다 '창조주를 기억하라'

임재presence와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시간present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시간은 신이 쏜 화살이다. 레비나스는 시간이 무지향적이라 하였다. 하지만 시간은 무결하게 흐르는가? '때가 악하다'는 것은 그 시간이 무성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로잡힌 시간 위에 신은 구속사Geschichte를 아로새긴다. 벌거벗겨진 무성은 '덮여질' 때, 그리고 '채워질' 때 구속된다. 시간은 벌겨벗겨져 있고, 유린당하고 있다. 시간을 어떻게 구속하는가? 우리는 시간의 충만성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우리는 시간을 무엇으로 덧입히게 해야 하고, 그 '무지향적 시간'을 과연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 젊은이여,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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