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시차 적응 - 3.5.2018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시차 적응 - 3.5.2018

jo_nghyuk 2018. 5. 4. 04:25

차차 독일 유학생활에 적응이 되어 가는 듯 하다. 

최근에는 시내에 나가거나 돌아올 때 자전거를 이용하고 있다. 도서관에 도착하면 늘 읽던 자료를 공부하고, 고전어 수업 준비를 하면서 수업 시간을 기다린다. 일년 정도가 지나고 나니 언어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진 것을 본다. 그렇다고 나의 독일어가 유창해진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는 고전어 수업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큰 스트레스였음을 생각해보면 그래도 꽤 나아지긴 했나보다. 

무엇보다 책을 읽어내려가는 데에 있어서 단어를 덜 찾는 기쁨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 같은 책인데도 앞부분을 보면, 이런 단어까지 몰랐나 할 정도로 상당히 심각한 어휘의 결핍의 흔적들이 보인다. 15개월 정도 지났는데, 고전어 하나는 끝나가고 있고, 새로운 고전어 수업과 병행하고 있는 중인데, 기초과정이라 그다지 힘들지는 않다. 다만 시간과 체력 안배가 이제는 매우 중요해져서, 아침시간에 무엇을 해야 하고, 오후에 무엇을 해야 하며, 집에 돌아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휴식과 운동은 어떻게 적절하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면서 조정해가는 중이다. 처음 몇개월 간은 무리를 해서 몸살에 걸리거나, 두려움과 나태함과 무기력함이 섞인 하루하루를 보내거나 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가 점차 차근차근 해나가는 방법을 적용하면서, 무리하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은 패턴을 조금이나마 찾아내었다. 

지난 수요일 오버제미나에서 교수님과 "도구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기"에 대해서 토론한 일이 있었다. 만약 현재의 삶에서 효율성과 성취 중심으로 간 나머지, 자신의 삶 가운데 가정이나 인간 관계나 또는 스스로의 마음이 크게 타격을 받고 있다면, 효율중심의 삶에 대해 재고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주제였다. 물론 성취적인 삶을 아예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균형을 '스스로' 찾아나가는 일이다. 나는 이 '스스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는 어떤 모범답안 같은 것이 선험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과정 속에서 구성해가는 창조적인 작업에 가깝다. 

그래서 최근 독일 유학생활에 적응이 되어 가는 듯한 이 기분은, 효율성과 존재하는 그 자체의 기쁨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철저히 효율적인 삶만도 아니요, 철저히 관상적이기만 한 삶도 아닌, 두가지 모두를 아우르는 그런 방법 말이다. 중요한 것은 아우른다는 것도, 결국 나 자신 스스로의 방법론을 찾는 것이지, 어떤 절대적인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 관점에서 다른 관점으로 넘어갈 때마다 나는 시차와 멀미를 느낀다고 말한 일이 있다. 이를테면 독일어를 일주일 내내 쓰다가 수요일만 되면 연구소에서 영어를 써야 하는 그런 전환점이 그동안은 많이 부담스럽고 힘들었다. 펼쳐놓은 독일어를 접어두고 접어둔 영어의 기지개를 피는 작업, 다음 날이 되면 반대로 접어둔 독일어를 다시 펼치는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 어떨 때는 감당하기가 버거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를 지속적으로 펼쳐놓고, 동시에 독일어를 지속적으로 펼쳐놓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접어둔다는 것 자체가 웅크림을 의미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기능적인 선택보다, 심리적 위축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상시 펼쳐놓은 상태가 되려면, 무엇보다 독일어나 고전어, 영어 등을 즐거워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즐거워하지 않으면서 억지로 펼쳐놓는 것은 고문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참 좋아한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람은 마치 아이가 장난감을 사방에 펼쳐놓듯이 펼쳐놓고 즐거워할 것이다. 아이는 장난감이 방 안에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를 의식하면서 어지르지 않는다. 물감을 퍼뜨리듯이 그저 자연스럽게 펼쳐놓는다. 놀랍게도 "완벽해야 한다"라는 스스로의 규율과 중압감에서 해방되고 나니, 장난감 몇 개는 잃어버릴 때가 있지만, 참으로 즐겁게 언어공부를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엇이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인지를 아는 사람은 그래서 참으로 자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자유한 사람만이 한 관점에서 다른 관점으로 유연하게 성단을 여행하듯이 움직일 수 있고, 마치 유영을 하듯이 자연스럽게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처음에는 시차와 멀미가 심하지만, 계속 하다보면 두가지 관점을 조망하는 (그러나 여전히 스스로의 관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은 채로) 넓은 시야를 갖게 될 것이다. 연구소에서 말하는 multi-dimension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이제서야 눈이 조금 트이는 느낌이다. '무슨 관점을 가져야지' 하고 강박적으로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좋아서' 넘나드는 그런 게릴라적인 자유로움을 누리고 싶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