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The folly of desire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The folly of desire

jo_nghyuk 2019. 3. 8. 20:09
공연장에서 오랫동안 계속되던 박수를 내가 멈출 때 다른 사람들도 멈추는 시점에서 문득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나에게 공통감각이란 게 생겨난 것일까. 어릴적의 나는 분명히 공통감각과는 거리가 먼 예민함과 엉뚱함과 불안함이 뒤섞인 사람이었다. 수채화의 물통처럼 검고 혼돈한. 그때의 나는 언제 박수를 쳐야하고 언제 마쳐야 하는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무엇이 적당한 것이며 무엇이 넘치는 것이며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 모르는 아이였단 말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자유와 절제 사이에서,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사이에서, 엉뚱함과 진중함 사이에서 나의 길이 형성된 걸까. 내 삶이 리셋이 되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아이가 넘치는 감성을 가지면서도 언어를 훈련하는 과정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낀다.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난 후, 나의 이성과 감성과 의지가 균형을 맞추기까지 그로부터 십수년이 흘렀다. 그 정도로 지난하고 고단한 여정이었다. 그렇다면 길가에 핀 작은 꽃에는 얼마나 위대한 힘이 깃들여 있는 것인가. 약한 것이 지옥에서부터 기어나올 때 그 사지를 견인하는 힘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는 법이다. 

공연장에서 보스트리지가 노래할 때 나는 작열하는 섬세를 느꼈다. 터질 것 같지만 눈부신 필라멘트. 백열등이 에너지를 빛으로 환원할 때는 열로 방출되는 저항이 심하다. 루터는 재능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빛을 내려면 많은 열의 저항이 따르는 법이다. 최근에 나는 진실된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는 저토록 순수하게 뜨거웠던 적이 있는가, 자신이 방출하는 열의 저항을 아끼지 않고 하얀 빛을 내는 현존재들은 사랑보다 효율을 앞세우는 나를 일깨운다. 멜다우는 단지 몇 번의 공연을 위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와 블레이크, 예이츠 등의 시에 색을 입혔고, 보스트리지는 뜨겁게 빛과 열을 내뿜었다. 테마인 The folly of desire처럼, 그들은 자신의 갈망의 에너지에 대해 최소한 정직한 사람들이었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들을 가곡으로 만든 슈만의 프로그램까지 끝나고 사람들이 자리를 떠날 때, 객석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모양에서 나는 엔트로피의 처연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때 멜다우는 Everytime we say goodbye, I die a little을 연주했다. 무너지는 힘을 그대로 인정하며 물안개과도 같이 소멸과 생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재즈적인, 참으로 재즈적인 순간이었다. 이 덧없는 뜨거움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키는 현존재들만 누릴 수 있는 기쁨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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