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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존재

jo_nghyuk 2019. 3. 11. 03:59

"사람은 시인으로 이 땅에 산다" (dichterisch wohnt der Mensch). 시를 짓는 것이 단순히 헤매는 것이 아니고 건설을 통해 방황을 끝내는 것인 한, 시는 사람이 이 땅에 살 수 있게 해준다. 그러려면 언어와 나의 관계가 바뀌어야 한다. 언어가 말한다. 그때 사람은 언어가 자기에게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언어에게 답한다. 그래서 훨덜린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시인으로 이 땅에 산다." 하늘과 신을 향한 마음과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실존 사이에 긴장이 유지될 때, 사람은 비로소 산다는 것이다. 

시는 시를 짓는 재주 이상이다. 포이에시스(poiesis), 곧 창조이다. 가장 넓은 의미의 창조이다. 그런 뜻에서 시는 본래의 삶이다. 사람은 시인일 때만 산다. 

(폴 리쾨르, 해석의 갈등, 한길사, 513.)


최근에 나는 리쾨르의 해석학 책에서 진리의 순간을 만나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책 속의 말이 나를 채근한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의지가 아니라, 우리에게 말을 거는 '말씀'이다"라고. 그 말씀은 우리의 의지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노력과 욕망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실존 자체를 감싸안는다고. 

우리를 감싸는 경험이 있어야, 우리는 '들을 수' 있다. 아버지가 아닌 자의 음성에 우리는 귀기울일 수 없다. 우리와 화해하지 않은 자의 말은 위협일 뿐이지만, 우리와 화해한 자의 말은 우리를 감싸고 우리를 일으켜 세운다. 

역설적이게도 의지로는 욕망을 가진 존재를 결코 바꾸지 못한다. 욕망과 의지는 힘과 힘의 충돌이기 때문이고, 부정성을 부정하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긍정성의 현실을 기다릴 뿐이다. 위로의 언어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심판이 아니라 긍휼로써, 명령이 아니라 위로로서, '되어라'의 Imperativ가  아니라 '되어진다'의 Indikativ로서, "현실성"으로서, 그 사랑의 장 안에서만 우리는 변화를 기대해야 한다. 그 말은 위로이지만 단호한 선언이다. 선언적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네오는 사건이 '계시'이다. 

나는 이쯤에서 생각한다. 대체 언어는 무엇인가? 언어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리쾨르의 말대로 은총이며 기적이다. 언어가 우리를 다스리며, 언어가 우리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를 받치고 있다. 내 삶은 내 의지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그 말씀으로 견인되어져 온 것이다. '들음'에서 오는 순종만이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킨다. 헬라어의 '인격'이란 단어는 '연단', '시련'과 같은 단어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련만큼 나는 연단되어진다. 그 시련을 받아들이고 시련이 거는 말을 '들을 때', 연단이 시작되고 인격이 형성된다. 사람의 인격은 지금까지 연단되어온 시간의 적분값이다. 그런 점에서 인격은 관계 속 공동체적 자아이며, 참으로 열린 창문들을 가지고 있다. 나를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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