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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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3월 29일 아침기도회 복기

jo_nghyuk 2019. 3. 29. 19:34

한국에 존경하는 목사님 한분이 당신이 생각하기에 영원은 하나님 안에서 보낸 공동체적 시간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오늘 기도를 하면서 깨닫게 하신 통찰 하나는, 내가 정직함과 거룩함으로 주 앞에 나아가는 시간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전적으로 새로운 시간이 형성되어간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정직한 사람은 믿는다고 고백을 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믿는 "새로운 현실성"과 여전히 변하지 않는 "옛 현실성"이 충돌할 때에 끊임없이 분투하고 투쟁한다. 이 사람만이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늘 권면하였다. 믿음은 말에 있지 않고 그의 삶에 있다.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고 내가 분투하는만큼 형성되어간다. 이점에서만큼은 나는 철저히 실존주의자이다. 

그렇다면 내가 24시간 늘 전진하는 싸움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욱 그리스도인의 새 시간들을 축적해갈 것이다. 그의 통치가 나의 하루를 더 점유하는 만큼, 나는 그만큼 더 성화되어질 것이다. 그가 어떠한 시간을 보내었는지의 이야기는 성화된 그의 인격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왜 자꾸 모른체하고 살아가는가. 그것은 인간이 철저히 기만적인 죄인이기 때문이다. 환경보호가 어려운 것은 이전의 편안한 삶을 버리고 불편함을 의식적으로 자꾸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차라리 '모른채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죄를 모른채로 살아간다고 해서 허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 방에 쓰레기를 무시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동소멸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깨끗한 방은 그 방의 주인이 부지런하다는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가 33년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를 함축하고 있다. 왜 우리는 너무도 자주, 열매는 간절히 원하면서 뿌리부터 진액을 빨아들여서 고통스럽게 가지를 내뻗는, 척추부터 뒤흔들리는 나무의 고통스러운 과정은 추적해보지 않는가. 아름다운 꽃이 떨어져야 열매가 맺히는 그 메마르고 뒤틀린 광야 길은 묵상하지 않는가. 그건, 인간이 뿌리부터 기만적이기 때문이다. 그 맨얼굴을 직면해야만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광야라고 하더라도, 그 길은 열매가 가득한 길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제대로 믿는 순간부터 그래서 너는 외로워진다. 평균적인 삶의 궤적으로 그래프를 그리던 삶을 멈추고, 자꾸 튀어오르는 도약을 감행할 때마다, 편안한 그래프에는 균열이 일어나고, 파열음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너는 단단해보이는 알을 깨는 중이고, 그 알을 깨고 나와야만 네 부드러운 살 속에 견고한 뼈가 자라나 너의 견고한 심지가 되어줄 것이다. 

그래서 오늘 기도하면서 늘 존경했었던 청년부 시절의 어떤 목사님과 나의 간극을 점점 메꿔가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존경한다고 변하는 것은 없다. 그 인격을 참으로 갈망하고 사랑해야 그와 가까워질 것이다. 이전에는 그 견실한 멘토를 따라간다는 것은 꿈도 못꾸는 일이었다. 넘사벽. 그러나 점차 깨닫는다. 이제 나는 목사로서 그때의 그 목사님의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고 그 부담스러운 벽을 뚫고 나가야 내가 사랑하고 보호해주어야 할 다음 세대에게 희망이 있다. 나는 그 목사님이 그랬듯, 깨끗하고 순결하며 진실되고 뜨거운 것을 전해주고 싶다. 그 목사님은 가진 은사가 별로 없었으며, 언변도 약했다. 그러나 그는 뜨거운 용광로였고, 언제나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았으며,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단순했다. 나는 이제 그 모습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사모해야 하는 세대의 반열에 들어서는 중이다. 감당할수 있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능력이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꿈꾼다. 단단한 부드러움과 정직함에서 나오는 유연함을. 나는 내가 존경하는 사람의 모조품이 아니라 그의 2.0 버전이 되고 싶다. 단단한 젊은 목사였던 그분은 이제 온화함을 겸비한 중견 목사가 되고 있는 중이며, 나는 이제 겨우 조금 단단해진 얼간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는 큰 꿈을 꾸고 싶다. 나는 더 큰 바다로 나가고 싶다. 왜냐하면 그것을 일부 이미 맛보았기 때문이다. 기도가 쌓여갈수록, 나는 새로운 나를 계속 발견한다. 나는 유약하다고 고백했었지만, 그는 나를 강한 군사라고, 나의 좋은 친구라고 명칭하신다. 그 음성 외에 나를 끌수 있는 것은 이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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