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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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의 수기, 시간과 영원의 관계성

jo_nghyuk 2019. 4. 3. 18:30

여행을 다녀오니 벌써 4월이다. 나무에서는 초록 잎새가 몇주만에 만난 아이처럼 훌쩍 돋아나있고, 흐린 날에도 제법 선선하다. 아침에 지인과 대화하면서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주는 쓸쓸함과 그 채워지지 않는 무엇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비슷한 연배여서인지 오랫만에 깊은 부분이 다루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같은 책을 여러번 반복해서 읽는 편인데, 어제 읽은 책에서도 인간이 본질적으로 emptiness를 가지고 있는 vulnerable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권면하고 있었다. 그 공허함이 채워질 것만을 기대하는 것은 집착이지만, 그것을 희망하는 것은 사랑이고 동시에 기도이다. "주여 나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 참으로 존재하게 도와주소서"

아우구스티누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우리에게는 내뻗음이 있는가 하면, 분산되어짐도 있다. 둘 다 우리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영원은 단순히 이것을 해결해주는 형이상학적인 무엇이 아니라, 우리의 내뻗음과 분산되어짐의 시간적 경험을 더욱더 심도있게 하는 내재적인 무엇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껏 분산된 우리의 시간의식이 영원에 의해 통합되어지는 경험만을 생각해왔지만, 사실 인생에서 많은 부분은 시간성 그 자체의 경험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시간성 안에서의 영원을 거꾸로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 무엇이 "영원한 시간"인가? 내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오독한 것처럼 단순히 시간이 영원 속으로 들려올려지는 것인가? 하이데거도 그러한 영원성을 비판하지 않았던가? 나는 시간연구에서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봄은 그냥 온다. 기다리든 기다리지 않든 봄은 정해진 때에 온다. 그리고 그 봄은 모든 생명의 장이 되고, 현실성이 된다. 봄이 오지 않으면 나뭇가지는 앙상한 채로 머물러 있을 것이나 봄 덕분에 잎과 꽃을 내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영원은 동떨어진 초월성이 아니라 시간의 근원이고 시간의 목적이고 시간의 중심이다. 영원이 시간에 돌입할 때에,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올 때에 시간은 생동성을 얻고 활력을 얻는다. 그리스도가 가져온 구원과 화해의 현실성은 이미 시간 안에 돌입하였다. 그로부터 시간은 다시 출발해야 한다. Wir fangen mit dem Anfang an. 나는 처음으로 가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허한 비존재에 가깝지만, "관계" 안에서 빛을 발견하고, 힘을 얻어서 살아간다. 영원과 시간의 관계성처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사람을 살리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사람을 살린다. 시간은 상대성이며 관계성이다. 어떤 관계성의 현실 안에 있느냐에 따라 차가운 시간이 되기도 하고 따뜻한 시간이 되기도 한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어디를 겨냥하느냐에 따라 시간성의 질은 달라진다. 충만한 시간이 있는가 하면 공허한 시간도 있다. 시간은 "의미"로 채워진다.

나는 아침에 지인과 대화하면서, 우리가 느끼는 쓸쓸함은 젊은 시절에는 느낄 수 없던 무엇임을 발견하였다. 젊은 때에는 재미를 추구하지만, 나이가 들면 의미를 추구하게 된다. 하이데거도 시간성은 의미로 충만해진다는 표현을 한 바 있다. 나는 어떤 의미를 겨냥하며 살 것인가. 재미가 공허한 나이가 되었다.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엘리엇처럼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 되어버릴 지도 모르는 일이다. 주여 나로 하여금 충만한 시간을 경험하게 하시고, 화해의 현실성의 깊이에 가닿게 하소서. 가진 갈망과 에너지를 올바른 방향으로 겨누어 의미의 과녁에 가닿게 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나는 시간 속 분산만을 겨냥할 뿐입니다. 당신과 함께 과녁을 올바로 겨눌때 나는 완전한 통합을 시간 속에서도 경험할 것입니다. 시간이 들어올려져서가 아니라, 시간에서 도피해서가 아니라, 시간 자체가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너의 하나님은 여전히 작다" 말씀하시는 주님, 내가 무엇을 구하면 "왜 더 좋은 것을, 최고의 것을 구하지 않니"라고 물으시는 주님, "난 너의 그림이 참 좋다"라고 말 걸으시는 주님, 나로 하여금 깊고 넓은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열매를 준비하는 봄을 보내게 하소서. 흩어 사라지는 가라지같은 시절을 보내지 않게 하소서. 나의 앞날이 당신의 손에 있나이다. 당신의 손에만. 나의 한두걸음을 인도하시고 나의 발을 보호하소서. 앞서가기보다 차라리 더디게 하시고 헤매기보다 차라리 느긋하게 하소서. 

a France,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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