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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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I'inconditionné

jo_nghyuk 2019. 4. 4. 20:44

"우리는 그 다음 논지를 잘 알고 있다. 즉 현상적인 속박이 없는 순수한 초월적 관념으로서 자유는 스스로 인과적 연쇄를 시작하는 능력의 궁극적 의미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초월적 자유를 토대로 자유의 실천적 개념이, 다시 말해 감각 성향들의 제약에 대한 의지의 독립성이 성립된다." Kant, Critique de la Raison pure, A. Tremesaygues et B. Pacaud, 리쾨르의 타자로서 자기자신 150-151에서 재인용.

리쾨르를 읽다가 최근에 고민하고 있는 자유 개념에 대한 사유의 비슷한 궤적을 만나서 놀라고 있는 중이다. 다름 아니라 칸트의 무제약자l'inconditionné의 개념과 관련하여, 인간이 현상들의 인과관계의 망 안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사실은 그 인과관계로부터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할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는 현상들의 시간 순서 상으로는 그것들을 초월할수 없지만, 인과의 순서에 있어서는 초월적이라는 것이 칸트의 요지이다. 자유는 현상의 속박을 받지 않고 스스로 인과적 연쇄를 시작하는 능력의 초월성이다. 리쾨르는 여기서 행동자가 "행동할 수 있는 능력"(153-4)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한다. 이 사유는 '어쩔수 없었다'라고 이유를 대는 행동자의 윤리적 책임에 대한 날카로운 화살이 되기도 한다. 어떤 책은 두번, 세번 읽어야 할 때가 있는데 리쾨르의 책이 그러한 종류인듯 하다. 나는 결코 이 책을 한번에 독파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어깨에 힘을 빼고 나니 '반복'의 견실함으로 차근차근 해나가는 길이 시야에 들어온다.

인간은 무제약자와 제약자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그는 제약을 받으며, 동시에 제약을 받지 않는 결정과 행동의 자유가 있다. 그는 모든 현상과 사태의 중간에서 끼어드는 in medias res 실천적 시작을 행할수 있는 존재이다. 어쩌면 화이트헤드가 말한 가능태를 현실태로 바꾸는 '주체적 지향'처럼, 인간 존재는 많은 가능성들에 떠밀려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매개들을 가지고 스스로 연쇄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통합적 힘을 지닌 존재이다. 인간은 행동하는 힘과 행동의 자유를 지닌 존재이다. 이것이 리쾨르의 '네번째 연구:행동에서 행동자로'에 대한 나의 독해이다.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도 큰 empowerment가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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