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4월 7일 찬양인도 복기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4월 7일 찬양인도 복기

jo_nghyuk 2019. 4. 7. 23:07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다. 기도를 하고 능력을 받으면 꿈에서 원수를 이기기도 하고, 기도가 부족하면 원수에게 기가 눌리는 그런 꿈을 꾼다. 꿈에서 내가 날아다니고 있다면 나는 그걸 영적 상태가 꽤 좋은 것으로 해석해오곤 했다. 그런데 이번 꿈은 좀 달랐다. 강도가 버스에 들이닥쳐서 처음엔 두려워하다가 내가 능력이 있는 것을 깨닫고 그 능력으로 날면서 강도들을 다 지구 밖으로 던져버렸다. 보통은 이렇게 기분좋게 끝나는데, 박사(나는 꿈에서 그를 박사라고 불렀다)같이 생긴 이가 버스에 들어왔고 나는 그와 겨루었지만 승부가 나질 않았다. 압도당하지는 않지만 이길수는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 도시(그는 버스를 도시라 불렀다)를 멸망시켜야 하니 여기서 나가라고 했다. 나는 그 버스에서 나왔고 능력이 약한 이들이 그때 그 버스로 들어가려 했다. 나는 당신들의 능력이 약해서 절대로 이길수 없을거라고 했다. 그들은 그래도 버스를 지키기 위해 들어갔으며, 철저히 짓밟히고 살육당했다. 

이 꿈은 프로이트 식으로 보자면 가까운 지인의 이야기 내용이 무의식에서 그림을 만든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나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겹뜻이 있는 그림이다. 그런데 그런 것과 별개로 중요한 의미내용 하나는, 내가 그 상대와 싸우기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 꿈에서의 나는 기존의 나처럼 능력이 있었고, 적들을 섬멸할 힘이 있었고, 하늘을 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큰 상대를 제압하는 힘은 없었다는 점이 지금 내가 집중하는 지점이다. 

교회에서 찬양인도를 하면서, 이 찬양의 가사가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심리학적으로 흐른다는 것을 직감하는 순간이 있다. 영적인 싸움은 훈련이어서,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정말이지 찬양을 해도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너희가 나를 전심으로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 이 말은 나에게 "네가 전심으로 피흘리기까지 싸우고 싸우면 이기리라"로 들리는 것이다. 여기에 십자가 신앙의 시금석이 있다고 나는 본다. 교회에서 부드러운 봄의 찬양을 부를 수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연약한 나를 토로할 수 있다. 충분히 그래야 한다. 그런데 '경향'이라고 하는 것은 무서운 것이어서 우리를 거기에 머물게 하고, 싸우지 않고 도망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봄이니 봄에 관련된 찬양을 넣어볼까, 예수님과 동행하는 찬양을 넣어볼까, 이렇게 소녀적인 찬양을 부르기만 해서는 정말이지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의 힘과 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하고 구하는 중심의 정직함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정직하면 더 멀리 갈수 있다. 순결하면 더 견고해질 수 있다. 그 시야와 견고함을 가지지 않고 '사랑'을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도매급이다. 

I dare not trust the sweetest frame.

싸우려고 온 힘을 다해 밤낮으로 기도해도 이길까 말까라고 옛 스승이 말한 바 있다. 그만큼 정직한 훈련이다. 도무지 희석될 수가 없는 뜨거운 피와 같은 신앙, 나의 스승들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정직함, 순결함, 올곧음, 기도, 겸손함, 온유함, 사랑. 목숨을 걸고 싸워도 될까 말까한 씨름 앞에서 대체 너는 무슨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냐. 그 좋은 스승들을 만나고도 이 모양이라니, 목사라는 타이틀이 부끄럽다. 하나님은 솔로몬처럼 늘 꿈으로 나에게 경고하신다. 이 경고는 꿈의 언어 안에 은유로 숨겨져 있다. 곱씹고, 곱씹어서, 마치 말씀을 묵상하듯이 자꾸 천착해 들어가고, 스스로의 내면과 맞부딫히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을 기어이 꺼내고, 가장 깊이 숨겨놓았던 속임수를 인정하고, 온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해서 앞으로 내뻗을 때에 비로소 경험하는 생명의 감각들이 있다.

오늘 찬양인도를 하며 느낀 것은, 나만큼은 강해야 한다는, 매주 깨닫는 단순한 진리였다. 내가 최전선이다. 내가 무너지면 다른 군사를 기대할 수 없다. 능력을 구하는 자도 많지 않고, 슬프지만 정직하려 하는 자도 많지 않아 보인다. 이 말은 정죄가 아니라, 그냥 내 앞의 현실에 대한 날선 나의 감각의 신호이다. 그래서 더더욱, 내가 이기지 못하면 내 뒤의 사람들은 다 죽는 것이라는 꿈의 내용이 나를 찌른다. 나의 아내가 죽을 것이며, 나의 가족이 죽고, 나의 공동체가 죽을 것이며, 나의 제자들이 죽을 것이다. 나의 도시가 죽을 것이며, 나에게 보내려고 하셨던 이들이 전부 죽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저번 수기에 기록했듯이, 내가 등을 보고 달리던 엄청나게 빡센 멘토의 자리에 내가 어느덧 서있는 것이다. 서있어야 하고, 서있을 수 있고, 서있는 것이다. 싸워야 하고, 싸울수 있고, 싸우는 중인 것이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고, 꿈에서 다시 한번 보았다. 지금까지의 능력으로 싸우던 상대와 다른 상대가 앞에 있다. 그는 자신을 박사라고 표현했지만 내 눈에는 메피스토텔레스나 골리앗처럼 보인다. 나에게 능력이 부족해서 진 것이 아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순결하지 못해서 졌고, 정직하지 못해서 졌으며, 스스로를 속여서 졌다. 사심이 있어서 졌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내 뜻을 조금 섞어넣어서 졌다. 나는 깨끗하지 못해서 진 것이지, 전투력같은 게 부족해서 진 것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보다 성령의 열매를 구해야 할 때이다. 

하나님은 능력을 구하는 내게 물으셨다. "왜 더 좋은 것, 최고의 것을 구하지 않니?" 이 질문은 여전히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의 삶에서 여전히 많은 부분을 물음표로 남겨두시고, 빈 공간으로 남겨두신 의도에 대해 늘 질문하지만, 나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 그러나 내가 나를 속일 때 그 공간이 더러운 것으로 채워진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야 하는데, 반대로 하는 것 아닌가? 늘 질문해야 한다. 나는 죽고, 예수가 살아야 하는데, 늘 예수가 십자가에 있고, 나는 다른 곳에 있는 것 아닌가? 늘 반문해야 한다. 참으로 이상한 감각의 여운이 있다. '어쩌면 죽을만큼 해보지 않았다'는 그런 여운말이다. 나는 너무 머리가 좋아서, 하나님은 어리석고 단순하신데 혼자 지혜롭고 복잡한 길을 간다. 나는 너무 머리가 좋아서, 하나님은 좁은 길을 가시는데 나는 넓고 편안한 길로 눈길을 늘 돌린다. 

내 꿈은 의미를 던져준 것이 아니라, 나에게 여운을 남겨준 것이다: 너 정말 여기까지만 할거야? 너 정말 이런 식으로 계속 갈거야? 너 정말 어느정도 괜찮은 길로 다시 그렇게, 눈감고 살아갈거야? 매일 죽는 힘들고 멋진 극상품의 포도원길 말고, 덜 죽고 덜 힘든 벌레먹은 포도원길로 갈거야? 찬양에서 부드러운 가사들만 갈무리하고, 설교에서 나를 위로하는 문구에 너를 매달아서, 노예의지의 자유에 만족하면서, 너의 만족과 유익을 어느정도 구하면서 그렇게 갈거야? 네가 그러고도 그리스도인이야? 목사 이전에 네가 그러고도 신자야? 

내가 나를 몰아세우는 것인가? 그래 그럴수도 있겠다. 그런데 어쩌면 그건 나에게 준 달란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감각이 애초에 없다면 그건 할 말이 많겠지만, 이런 감각이 있는데도 그걸 무시한다면 나중에 할 말이 있겠는가, 뻔뻔하게? 

누가 넓은 길이 편하지 않아서 안 가는가? 누가 그 길이 즐겁지 않아서 안 가는가? 안 가려고 애를 쓰는 이유는, 다른 길이 어렴풋이, 보이기 때문이다. 가시덤불이 우거지고, 몇 찾지 않아서 매우 좁고 험한 어떤 바보같고 깨끗한 길이. 나는 지금까지 나의 스승들과 나를 분리해오는 데에 천재였다. 바보같고 청렴한 스승들을 존경하는 데에 천재였다. 그러나 바보가 되거나, 청렴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십자가에 목을 드리운 적도 없는 것 같다. 누가 나의 이런 모습을 병적이라 욕하려면 욕하라. 나는 지금 무언가를 보고 있는 중이니까. 인정받기 원했다면 굳이 왜 몸에도 맞지 않는 그 길로 가려고 몸부림치겠는가. 

안다, 나도 안다. 나 애송이다. 그 길을 가는 것이 아파서 가시 찔린 애벌레처럼 지랄 엄살을 떠는 작고 하찮은 나다. 그런데 한마디 하자면, 나는 손톱만큼이라도 더 정직해지고 싶고, 반보라도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고 싶다. 내가 죄인이더라도, 최소한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능력까지 거세시키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질그릇에 임할 그 벌벌 떨리는 거룩하고 무거운 임재를 더 구하다가 죽고 싶다. 

이것이 봄이 와서 봄 찬양이나 살랑살랑 하다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오늘 예배의 찬양에 대한 나의 복기이다. 부끄러워서 찬양 리스트를 적고 싶지도 않다. 그냥 십자가 찬양을 다섯 곡 부르는 것이 더 정직했을 수도 있다. 상한 심령 운운하면서 어제 오늘 내일의 레퍼토리로 돌려막으려다 된통 당했다. 성전 뜰에서 손 씻었으면 성소로 돌진해야 한다. 성소로 들어왔으면 벌벌 떨면서 피를 뿌리며 지성소로 들어가야 한다. 각 사람이 어느 단계에 이르렀던지 그대로 행하라. 뒤로 돌아가는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약한 척 코스프레해서 죄송합니다. 당신이 함께 하시기에 저는 모든 상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겨야 하는 것어서가 아니라, 이길 수 있는 싸움이기 때문에 저는 이겨야만 합니다. 저는 오늘 당신의 미래를 선취합니다. 

마음껏 쭉쭉 뻗어보자, 신앙의 팔다리를. 위축되지 말고 utmost를 내어보자, 그분의 highest를 위해서. 그것이 바로 각을 뜨는 번제인 동시에 산 제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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