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4월 26일 수기, c'est difficile mais très jolie.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4월 26일 수기, c'est difficile mais très jolie.

jo_nghyuk 2019. 4. 27. 02:29

한 주가 끝났다. 총 9번의 설교를 했고, 지난 금요일을 포함하면 10번의 설교를 했다. 요한계시록의 에베소 교회를 시작으로, 소아시아의 7교회에 대한 주님의 책망과 위로를 전했고, 요한계시록의 전체적인 개관을, 특별히 시간개념을 다루었고, 마지막 두 번은 요한일서에 나오는 이웃사랑에 대한 것으로 설교했다.

금요일의 마지막 아침 설교가 끝나고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다 (주님 죄송합니다). 무거운 짐이 등에서 끌러진 기분이었다. 사근사근한 햇볕 속에 아내와 총총 걸어서 집에 왔다. 그리고 나서 긴 낮잠에 들어갔다. 자고 일어나니 아직 번역해야 할 지도교수님의 원고가 떠올랐다. 서울에 가는 날은 보름도 채 남지 않았고, 이십 일 정도 뒤에는 교토에 간다 (교토가 중요하다). 번역작업이 많이 진척됐다고 생각했는데, 오후에 다다다 번역해도 반 밖에 못했다. 데드라인은 내일까지이니 살방살방 총총총 두두두두 해 나가면 내일 오후까지는 어떻게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초대받은 기도모임에 가서 눈치 없이 놀다 올 예정이다. 나도 좀 살자. 

저녁을 먹고 두 페이지 정도는 번역을 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내일 17시까지 원고를 보낼 수 있다 (한국 시간의 데드라인까지). 그리고 나면, 다음 주에 교수님이 설교 원고를 또 보내겠지. 모교에서는 독촉 메일이 올 것이고, 나는 독일의 지도교수님과 모교의 중재자가 되어 때로는 능청스럽게, 때로는 사려깊게 일들을 처리할거다. 

열 번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나는 주님의 가장 깊은 감정인 그리움을 묵상한다. 우리가 그분에 대해 별 생각이 없을 때조차 하나님은 우리를 열렬히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더 불꽃처럼 그리워하신다. 짝사랑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 외에 별다른 방도가 없어서이다. 사랑은 강요가 아니라 초대이며, 자유의 선택이다. 주님은 애타면서 기다리는 것 외에 가진 옵션이 별로 없다. 나는 설교 재탕은 하지 않는 주의이다. 상대적으로 준비 시간이 긴 저녁 예배 설교는 강해식으로 촘촘하게 준비되어지는 데 반해, 밤에 짧은 시간동안 준비하는 아침 예배 설교는 사흘 나흘이 지나니 예화의 향연이 되어버렸다. 강해와 주해가 촘촘하지 않으면 간증 따위의 예화가 설교의 자리를 떡 하니 차지하고 드러눕는다. 예배를 준비하며 기도하는데, 그 불충함에 대해서 부담을 주신다. 부담을 주는 것은 그것이 작게 여겨질 지라도, 변명의 여지 없이 회개하는 것이 옳다. 그러자 이 불충하고 작은 자에게 참된 안식과 위로를 주시고, '내가 할게'라고 말씀하신다. 엉엉.

나는 지금 나로서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생겨먹은 결이 나가는 대로 생활하는 리듬을 익히는 중이다. 거기에는 끙끙거리는 의지라든가 용기 같은 것이 아니라,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랑받는 자녀로서의 다소의 뻔뻔스러움이 필요하다. 일곱 교회 중 꼴찌 교회가 사데 교회였는데, 그 꼴찌를 라오디게아 교회가 경신해버렸다. 칭찬할 게 1도 없는데, 그런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도 전혀 감을 못 잡는다. 개념이 없다. 가서 쥐어 박아도 시원찮을 판에, 예수님은 그 녀석에게 가서, 내가 사랑한다, 사랑해서 뭐라고 하는거야, 라고 cafe melange처럼 말하신다. 내가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서 좀 분하다면, 그건 내가 model student complex에 걸려서가 아닐까. 에베소 교회처럼, 열심히 (나름 열심히) 하는데도, 칭찬과 더불어 책망을 디립다 받는다. 그럼 베드로처럼 요한을 째려보면서, 아 c 쟤는 왜 저렇게 편하게 사는데요. 라고 따지는 격이다. 그런 말을 들으시는 마음은 어떨까. 얘야, 내가 열심히 하라고 한 적 없다. 너가 나를 사랑해서 열심히 한 거 아니었니. 그런데 왜 사랑으로 안 나오고 행위로 나오니. 내가 너를 쟤만큼 안 사랑할 것 같아서 자꾸 열심을 내는 거였니. 아니면 우리의 뜨거운 사랑을 위해 신나서 열심을 내는 거였니. 

그러니까, 나라는 녀석은 할 거면 좀 제대로 해야 하는 빡빡한 면도 부정할 수 없이 존재하는 놈이고, 때로는 나사를 다 풀어놓고 그냥 광년처럼 푸른 초장을 소리지르며 뛰어다니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마음 같아서는 바우하우스 회화과나 조소과에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거나 찰흙을 뭉치고 박살내는 히피스러운 삶을 갈망하면서도, 신학이나 철학처럼 빌 에반스가 누르는 건반마냥 깔끔하고 꼼꼼한, 동시에 오묘한 작업도 좋아서 달려드는 그런 형질이다 (아내는 그것을 지랄맞다고 규정해주었다). 자유를 가지고, 똑바로 살고 싶다. 정직함이 여전히 우선순위이지만 뻑뻑하고 고지식한 것은 느무느무 싫다. 그러나 거지같은 유연함은 정말이지 죽여버리고 싶다. 투명해지고 싶고, 동시에 곡선의 리듬이 있는 그런 슴슴한 패턴을 소유하고 싶다. 그런 중에도 직선적으로 새처럼 솟아오르는 무제약적 자유의 뜨거운 영성도 가지고 싶다. 야 이 미친 놈아

왜, 바울도 조금 미쳐서 살았잖아.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삶은 제 정신이어도 재수없어 보이고, 미치면 그냥 재수없는 삶을 사는데, 이웃을 위해 살면 미쳐도 jolie고 제정신이면 정말 chic하지 않나. 나는 불과 얼음을 다 가져보려 한다. 불가능한 것을 꿈꾸면서.

독일어는 발음할 수록 혀의 세부적인 감각들이 더 명료하게 발달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이 든다. 프랑스어는 발화할 수록 화학반응에 대한 감각이 발달한다. 독일어는 분리시키고, 프랑스어는 뭉뚱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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