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4월 23일 수기, 프랑스어와 교토여행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4월 23일 수기, 프랑스어와 교토여행

jo_nghyuk 2019. 4. 24. 04:36

프랑스어 반이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선생은 내 이름을 저녁이라고 발화했다.

이미 배웠던 문법이라 그냥 놀면서 3시간이 흘러버렸다. 도시의 특성상 디자인이나 건축을 전공한 친구들이 있어서 뭐랄까, 경험하는 감각 자체가 새로웠던 것 같다. 다들 적당히 낯을 가리고 약간의 사교성을 가진 그런 사근사근한 분위기도 맘에 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에게 이보다 높은 반에서는 무얼 배우냐고 물었다. 과거형을 다룬다고 다음주에 한번 와보라고 했다. 나는 놀면서 한학기를 보낼 것인가, 빡세게 복습을 해서 지금까지 배운 것보다 수준이 높은 과정으로 빠르게 넘어갈 것인가를 다음주에 결정할 것이다. 7월에는 다시 빠리에 갈 예정이다. 

이번 주는 아침 저녁으로 예배 설교를 하고, 기도를 하고, 그 사이 시간에 설교를 쓰고 나면 교수님의 발표 원고를 번역하며 보내야 한다. 뜨거운 아침과 저녁 사이에 선선한 프랑스어 수업이 껴있는데 이 온도차가 참 좋다. 아침에 극렬하게 불타오르다가 오후에 갑자기 한량이 되는 이 낙차감.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또 심각해진다. 대체 무엇이 나일까.

5월에는 지도교수와 교토를 방문하기로 했다. 내 머리속에는 교토에 가서 어슬렁거릴 궁리 뿐이다. 교토에서 지인을 만나고 야끼소바를 먹고, 아라시야마에서 뱃놀이를 하고, 가모가와 강변을 거닐고, 북쪽의 산 속으로 숨어들고, 저녁에는 다시 마을로 나와 센토에서 목욕을 해야지. 그리고 흰 우유를 목욕탕 자판기에서 뽑아서 마시고, 동네 가정식 식당에서 조촐한 식사를 하며 만화책을 볼 것이다. 교회의 허름한 방에서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면 마룻바닥에 엎드려 기도하고 극히 평범한 6일을 보낼 것이다. 나는 교토의 느릿느릿함과 권태로움에 얻어맞을 각오가 되어있다. 나는 아침 저녁에는 나사가 힘차게 조여진 기차처럼 달리다가 오후가 되면 나사가 빠진 상태가 되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리듬에 익숙해지는 중이다. 

오늘도 프랑스어 반에서 정말이지 그림을 그리는 학생처럼 영혼이 자유롭게 풀려버리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언어를 배우는 것도, 발화하는 나를 경험하는 것도 실로 즐겁다.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다양한 음색의 언어를 듣고, 그들과 대화하고, 무심코 그들의 신발을 보는 것조차 참으로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창밖으로 난 파스텔 톤의 건물들 위에 빛이 걸터앉는 순간의 풍광을 보는 것, 저 면들 위에 색채가 내려앉는 장면을 보는 것도 참으로 행복감을 느끼게 했다. 아주 빨라졌다가 아주 느려지기도 하는 이 시차적인 리듬의 낙차를 나는 참으로 즐기고 있는 중이다. 이쯤되면 나도 내가 어떤 녀석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그냥 이러한 존재양태가 즐거울 따름이다. 나의 하루에는 작열하는 불꽃과 선선하게 부는 봄 바람이 교차해가며 공존하고 있다. 섞지만 말자. 진중해져야 할 때 바짝 긴장하고, 유쾌해질 때 마음껏 풀어져보자.

아무리 생각해도 이태리어는 배우고 싶지 않다. 나는 프랑스어만 사랑한다. 나는 여전히 하나에만 꽂힌다. 

프랑스는 푸르스름하고, 불란서는 불그레하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