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5월 3일 예나 성경공부 복기, nur du allein erfüllst mich.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5월 3일 예나 성경공부 복기, nur du allein erfüllst mich.

jo_nghyuk 2019. 5. 4. 13:53

두 가지 방향의 진리의 사고를 교차적으로 할 줄 알아야 한다. 1. 영적인 분별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2. 동시에 영적인 분별력을 위해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세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 (벧전 5:5).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나 신약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이미 선택을 받았으며 늘 은혜 안에 거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깨어 두려움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자세'였다. 이미 구원을 손에 넣었다고 자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과 실제 실력이 다른 것이다. 마태복음 13:11-15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은 늘 그가 주의 말씀으로 인해서 '갈등'을 겪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우리를 도전한다. 자기가 '본다'고 말하는 자들, 즉 스스로 서있다고 자신의 신앙에 자족하는 자들은 맹인이 되었고, 자기가 '보지 못한다'고 말하는 자들, 즉 심령이 애통하고 늘 간절한 자들에게 주께서는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는 은혜를 주신다. 이것이 은혜와 자세의 놀라운 인터플레이의 관계성이다.

어설픈 '성령충만'에 대한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느끼는 그 공허함은 '십자가 신앙의 부재'에서 오는 것은 아닐지.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중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우리의 사고를 거슬러 행동하신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 말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갈등의 단계를 거치지 않는 매끄러운 관념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것은 신앙의 수준이 갈등의 단계를 거치지 않았음을 의미하지, 즐겁게 신앙생활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미성숙한 것일 뿐이다. 치열한 고민과 갈등과 몸부림을 치는 과정은 정직함에서 나온다. 우상숭배의 형벌은 자기가 만드는 우상과 비슷한 형상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시 115:8).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예수를 만들고, 자기가 믿고 싶은 하나님을 만드는 이는 스스로가 만든 온전치 못한 형상을 닮아간다. 우상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이렇게 사람은 자기가 만든 것에 걸려 넘어져 스스로가 비인간화의 비극을 경험한다.

내가 참으로 섬기기 위해 낮아질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찌꺼기가 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지극히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나의 자존감이 정확하기 때문이다. 이미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왕같은 제사장임을 알고 있다면, 주님으로만 채워지길 사모할 것이고, 사람 앞에서 비우기를 실천할 것이다.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채워지지 않는다면, 충만하게 채워지기 전에 사람에게서 그 채움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에게서 자존감을 채울 수 없다. 자존감은 감정이 아니라 지성을 뛰어넘는 평화의 Vernunft에 가깝다. 그것은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만으로 채워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평강의 충만이다. 주님만으로 먼저 채워지지 않으면, 이웃을 온전하게 기쁨으로 섬길 수도 없고, 기쁨으로 세상의 찌꺼기가 될 수도 없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늘 그러한 하나님과 접속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대체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주말을 무슨 기쁨으로 채울 것인가. 내 안의 주님이 계속해서 커지셔야 하고, 그 강하심에 늘 로그온 되어 있어야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경험할 수 있다. 주 안에 거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차갑게 식는 딱딱한 마음을 경계하고, 늘 부드러운 심령과 겸손한 마음, 애통한 자세를 사모해야 한다. 성장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탈바꿈'의 연속이며, 갈등과 결단의 모멘텀이 모인 그래프와도 같다. 자동적으로 편안하게 성장하는 신앙생활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끝이 없는 우회로Umleitung이며, 결코 핵심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고통스러운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를 질 능력을 우회로는 상쇄해버린다. 그러나 늘 주님으로 채워지는 사람은 십자가가 얼마나 기쁜 생명의 길인 지를 '보게' 될 것이다. 

채워달라고 하늘을 볼게 아니라, 차라리 뒤집어져서 그 바다에 풍덩, 빠지는게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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