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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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5월 12일 설교 복기, 새로운 말씀이 아니라 말씀의 반복이다

jo_nghyuk 2019. 5. 13. 04:34

한국에 오면 상대적으로 새로운 것들의 과잉을 경험한다. 교회 밑의 골목만 해도 일년만에 수십개의 점포가 바뀌었다. 모든 것을 한번만 하고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습관은 인지적인 층위가 피상적임을 의미한다. 반복은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고, 더 다채로운 것들을 익숙함 속에서 발견하게 한다. 익숙함의 뼈대가 오히려 다채로운 색채를 안심하고 인지하게 한다.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너는 그것을 '더 알아간다'

나는 독일에서 잘 살고 있다. 쓰던 것을 계속 쓰고, 고장나면 고치고, 또 고장나면 또 고치면서 말이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 흰 셔츠가 누래지면 흰 셔츠는 소모품이니 버리고 세일 기간에 두장을 사라고 조언하는 것을 듣는다. 소비의 홍수다. 독일은 분명 한국보다 선진국인데 문명의 선진화는 한국이 더 빠르다. 그러나 정신사는 어떠한가? 사람들은 너무 빠르게 타자를 판단한다. 판단하고 다음으로 너무 빠르게 넘어간다.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경박한지도 헤아려보지 않고, 더 겸허해져서 배워야 하고, 그 느림의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너무도 단순하고 명쾌한 사실을 부인한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찾고, 표피적 경험들을 쌓아올린다. 

나는 설교를 전하고 나서 기도인도를 하다가 놀라버렸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채워지지 않은 어설픈 상태에서,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상태에서 거룩한 습관을 반복하기를 싫어한다. 나는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그들에게 간청했다. 제발 열심히 기도하라고, 제발 사랑에 열심을 내라고. 기회는 지금 뿐이라고.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신의 갈급함에 무심한가. 우리는 얼마나 사랑을 놓치고 사는가. 

기회는 지금 뿐이며, 지금도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무색하게도, 사람은 그 기회를 놓치며 산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헤아려보지 않고, 더 좋은 것을 원하고, 구하고, 찾는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이 섭리 안에서 최고의 것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 새로운 사랑, 새로운 흥미, 새로운 옷, 새로운 자극, 새로운 음식을 끊임없이 찾아 유희를 누리기를 원한다. 허망하다. 허망하다. 나이든 사람에서부터 젊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불평 불만이 너무도 많다. 그리고 모두가 새로운 것을 찾는다. 

조금 불편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돈을 쓰고 체력을 쓰고 염려를 쓰고 마음을 쓴다. 그냥 조금 불편하고 넘어가면 될 일을 효율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 (무엇에?) 비효율적으로 '지금 여기'라는 현존을 쓰레기통에 처박아넣는다. 차라리 조금 더 불편해지고 현재를 얻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차라리 조금 더 지루해지고 자유로워지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차라리 조금 더 단조로워지고 눈에 빛을 더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내 노트북은 무겁다. 내 카메라도 크고 무겁다. 만약 내가 내 노트북과 카메라를 작게 만들기 위해서 돈을 쓰고, 기존의 것들을 버린다면, 그것은 더 나은 삶인가? 내 헤드폰은 박살이 났다. 벌써 솜을 양쪽 다 갈았고, 금이 난 상태로 쓰고 있다. 여행에 깜박하고 가져오지 않았는데, 기차 앞좌석에 앉은 할아버지가 3시간 내내 떠드셔서 안가져온 것을 후회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내 가방에 지나치게 많이 넣었다고 생각한다. 교토에 가서 좋은 사진을 남기려고 큰 카메라를 넣었고, 서울에서 일처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이렇게 글을 쓰기 위해서 무거운 노트북을 넣었다. 기차에서 읽으려고 킨들을 넣었고, 헤드폰을 깜박했다. 미니멀리즘은 덜 가지는 것이지만, 무엇을 정말 '가졌는가', 실로 내가 그것을 잘 사용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생활습관이다. 무거운 노트북이어도 큰 카메라여도 내가 소탈하게 그리고 요긴하게 쓰고 있다면 그것은 미니멀리즘이다. 노트북을 얇고 가볍게 하기 위해 돈을 쓸 궁리를 하고 카메라를 작게 하기 위해 돈을 만들 궁리를 한다면 물건들은 가벼워졌을지 모르나 그것은 맥시멀리스트의 어리석음에 가깝다. 

그래서 더 기도하려고 한다. 필요한 것을 사고, 필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욕심을 비우기 위해서. 한국에 오면 필요하지도 않은 것들을 사야만 할 것 같은 메시지가 창궐함을 느낀다. 나는 관심이 없었다가도 '그렇게 싸고 효율적이면 사야 하나'라는 생각이 치고 들어오려 하는 것이다. 미안하다, 그런 삶은 촌스럽다. 독일에서의 삶은 겉보기에 촌스럽고 디젤 기차를 타고 다니고 지갑에서 끊임없이 버스 승차권을 꺼내서 운전기사에게 보여줘야 하고 지하철이라곤 없고 환승도 없으며 길 위에 와이파이도 없지만 나는 깨닫는다. 무엇이 더 있어야 문명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없다고 성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있든지 없든지 감사와 자족함의 영성이 담백하고 정직하게 내 삶의 여백을 만들고 있는지의 여부가 참으로 세련된 삶이다. 단순한 반복 속에서, 일상의 반복과 거룩한 습관의 뿌리내림 속에서 더 깊고 세밀한 퇴적층을 만드는 것이 시간성이 충만해지는 비결이다. 새로운 것만 찾아서는,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고, 버린 과거의 쓰레기로 가득한 삶을 살고 말 것이다. 

한국교회는 말씀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니다. 한 말씀을 붙잡고 그것을 넘어서기까지 지루한 반복의 훈련을 하지 않아서 망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정직하게 그 습관의 뿌리를 내리려 하지 않는다. 말씀은 오히려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말씀이 귀한 것을 모르고, 순전한 사역자가 귀한 것을 모르며, 권위도 없고, 권세도 무시하며, 자기 고집과 아집으로 가득 차 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한국은 모든 것이 풍족한데도, 나는 이틀만에 독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감자만 먹던 도서관 카페테리아가 그립고, 몇 평 안되는 공간에서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던 기도처가 그립고, 순수한 청년들이 그립고, 선배 목사가 그립고, 아내가 그립다. 나는 독일을 떠나는 그 날에도 독일을 떠나고 싶지 않은 기분에 의아했다. 그토록 좋은 서울에 가고 그토록 좋아하는 교토에 가는데도, 독일이 더 좋았다. 단순하게 반복되는 그 일상이 주는 평안함과 단단함이 그토록 소중한 것임을 떠나는 날에 깨달았다. 유학 끝나기 전에 어서 깨달아서 다행이다. 새롭지 않고 익숙한 그 하루하루를 살면서 내면을 단단하게 해야 한다. 6개월의 매일의 아침 저녁 기도생활이 이정도의 열매를 맺는다면, 3년 뒤와 5년 뒤, 그리고 10년 뒤는 어떠할까. 심장이 뛰고 기대가 된다. 나는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이며, 그 황금기를 계속 경신하며 살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자기 자신의 반복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우리 귀에 맞는 새로운 어떤 것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늘 거슬려하는 그것을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기도해라, 싸워라, 승리해라, 첫 사랑을 회복하라, 예배를 회복하라. 이 거룩한 반복은 가정과도 같이 익숙하지만 그만큼 정갈하며 깨끗하다. 나는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것을 그칠 것이다. 그리고 익숙한 것을 반복하며 주신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며, 내게 주신 사람들이 얼마나 금강석인지를 매일 새로이 발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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