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5월 13일 수기, 할 수 있을 수 있음의 없음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5월 13일 수기, 할 수 있을 수 있음의 없음

jo_nghyuk 2019. 5. 14. 02:39

오늘도 중간에 깨서 글을 쓴다. 오늘은 매우 피곤해서 더 잘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0시 30분에 눈이 떠진다. 일어나 불을 키고 낮에 산 인절미를 주워먹는다.

오늘은 감사로 가득한 하루이다. 독일의 지도 교수님과 헝가리의 교수님 부부를 모시고 서울 투어를 하는데, 사랑하는 지인 두명이 차량운전과 역사 가이드로 도와주었다. 헝가리에서 오신 교수님은 매우 유쾌하고 유머러스했으며 소탈했다. 세종시장에 있는 투박한 국수를 먹는데, 자신은 이런 것이 좋다며 분위기를 즐겁게 띄웠다. 독일어도 잘 해서 영어로 대화했다가 독일어로 대화하기도 하면서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고 경복궁에 가서 여행객으로 번잡한 입구를 지나 사람들이 거의 없는 가장 안쪽의 겨드랑이까지 깊숙하게 들어갔다. 오, 사람이 없으니 우리 모두는 살 것 같았다. 조용해지자 나도 시야가 열려서 마음이 조용해지고, 나긋하게 말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는 인사동으로 가서 떡집에서 떡을 사서 먹고, 구경을 하고 식사를 했다. 돌아오는 길에 차의 가스를 충전하고, 한강변을 따라 달려 광나루로 돌아왔다.

내일부터 드디어 공식 일정인 학술회가 있다. 더 여러 사람을 만날 것이고, 많은 대화를 하게 되겠지. 분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벌써 서울에 온지 3일을 소화했는데 빼곡하지 않은 하루가 없었다. 그것도 나름 의미가 있고 매우 유익했으며 감사로 넘치는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굳이 무얼 하기보다 나를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흘러가야 하는 일정이다. 4일째가 되는 오늘은 교수님의 발표가 있고, 어머니가 오셔서 잠시 하루를 보낼 예정이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을 헛되이 땅에 쏟지 않고 잘 보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어제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나는 되도록이면 많은 지인들과 친구들을 만나려 했고, 그래서 참으로 서울에 온 의미가 있다고 느꼈다. 오전에는 조직신학 교수님이 나의 지도교수님에게 나를 매우 훌륭한 학생이며 자신이 보증한다고 말씀해주시는데, 부족한 제자를 향한 애정이 느껴져서 참으로 감사했다. 사람을 소개할 때, 또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때 단점을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장점을 부각하는 사람이 있다. 나의 서울의 삶과도 같이, 찰나와 같은 우리의 인생은 서로를 향한 다급한 판단보다, 느긋하게 다독이는 시간들로 채워져야 옳지 않겠는가. 

바라건대 남은 이틀을 정말 잘 보내었으면 좋겠다. 서울에 있을 때에는 서울에 존재하고 싶다. 서울에서 교토를 생각하거나, 독일을 생각하지 않고, 서울에 있을 때에는 서울에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많은 단점들을 품고 가면서, 기도하면서, 감사하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만나는 모든 것들을 어루만지는 그런 시간의 수행자가 되었으면 한다. 

시차적응을 빠르게 하길 원하는 조급함도 내려놓고, 당연스레 적응하지 못하는 몸을 다독이면서, 자연스러운 것들을 채근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상대방의 있는 존재 그대로를 자연스러움으로 개방해주기 보다 판단하고 칼질하고 가두어버리려 한다. 타자는 내가 어찌할 수 없음nicht-können-Können의 외심적 존재이다.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러운 나의 몸을, 그리고 나의 바깥의 존재들을 용인하면서 앞으로 나가는 그런 시간성을 더 경험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나의 몸이라고 하는 타자부터 잘 다독이면서 가야 한다. 오만한 눈으로는 그윽하게 바라볼 수 없고, 딱딱한 마음으로는 품을 만한 공간감을 기대할 수 없다. 좀 더 힘을 빼고, 좀 더 느슨해져서 많은 이들을 품고 가는 그런 넓은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 교수님이나 헝가리 교수님처럼 그렇게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겸손하고 소탈한 사람, 나사가 하나씩은 풀려있는 사람 냄새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따라 아내의 머리칼에서 나던 냄새가 생각이 많이 난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