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6월 17일의 수기, 뛰지 말고 걸으라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6월 17일의 수기, 뛰지 말고 걸으라

jo_nghyuk 2019. 6. 17. 23:04

나는 약했던 걸까, 외로웠던 걸까. 악은 선의 결핍된 상태라는 말이 있는데, 외로웠기 때문에 약하였던 것은 아닐까. 내 주위에는 약하지만 꿋꿋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꿋꿋이, 라고는 하지만 그 터질듯한 고통을 누가 감히 계량할 수 있겠는가. 나이를 불문하고 그렇게 울면서 지긋이 길을 밀고 가는 친구들로부터 나는 꽤 많은 것들을 배우는 중이다. 

다 사람이다.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견디기 힘들면 울며 주저앉게 되는 그런 사람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나아가는 사람들의 어떤 결기로부터 나는 격려와 사랑이 담긴 음성을 듣는다: '혼자인 것처럼 포기하지 말아라'

나는 약한 나를 짓밟는 수레바퀴 밑에 깔리는 현실성을 당연히 여기며 살아왔다. 약함은 터져서 악함이 되고, 외로움은 응결되어 내 안에 냉혹함 같은 이심적인, 참으로 이심적인 목소리를 남겼다. 그러다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사람을 통해) 만나고, 사랑만이 냉혹한 법체계를 뛰어넘어 나를 구원하는 것을 경험했다. 사랑만이, 참으로 사랑만이 연약해서 선의 결핍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구원한다. 

누가 나를 그렇게 몰아세웠길래 나는 사람을 몰아세우는 설교자가 되어버린 걸까. 나는 발작적으로 기침을 하는 병자처럼 또는 오발탄을 뱉으며 뒤틀리는 총신처럼 그렇게 험하게 말하고는 한다. 정직을 빙자해서 나도 지키지 못하는 것을 거세게 쏘아댄다. 아니, 내가 지키지 못해서 강박적으로 더 밀고 나아가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이 가련한 자를 누가 구원하랴. 

그렇게 멍청한 삶을 살아와서, 은혜가 주어졌는데도 은혜를 은혜로 안 받고 부들부들 떠는 개처럼 뒷걸음질만 친다. 뜨거운 피가 흐르지 않는 사유를 붙들고 아무쪼록 그렇게 되어보려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자꾸 입는다.

버틸거면, 이유를 알고 좀 버텼으면 좋겠다. 나는 은혜에 감사해야 할 때에, 자꾸 그것에 부응하여 보답할 것만 생각한다. 이런 모습이 다른 사람 안에 있을 때 그렇게 짠하고 불쌍하더니, 정작 내 문제가 되니 거미줄처럼 누구보다 팔다리가 끈적하게 사로잡혀 있구나. 

나는 바리새인들도 참 불쌍하다. 그들의 모멸의 대상이라기 보다 긍휼의 대상이다. 자유하지 못하니까 율법을 붙들고 큰소리 치는 것 아닌가. 그들이 교만하다고 하면 오히려 실상은 작은 그들을 크게 보는 시선 아닌지. 그들은 작은 개처럼 두려워서 크게 짖고 있는 것일 뿐이다. 자신이 묶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싶어서 그들은 더욱 크게 짖을 따름이다. 

그래서 열심히 하기 이전에 사랑의 친교가 회복되어야만 한다. 내가 만드는 효율성으로 존재를 확인하는 게 아니라, 사랑 받음으로 지금 존재하고 있음을 경험해야 한다. 

이유도 모른채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그 길은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

좀 천천히 걸어야 꽃도 보이고, 강의 유속도 느끼지 않겠냐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