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6월 18일의 수기, 시덥잖은 백마디 말보다,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6월 18일의 수기, 시덥잖은 백마디 말보다,

jo_nghyuk 2019. 6. 18. 17:06

누군가를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하다. 그러나 결코 그 엄정함은 사슬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판단하는 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 무거운 긴장을 가지고 그는 몇 보 나가지 못한다. 

나를 살리는 것은 나의 의도 죄도 아니요, 들려오는 말씀이다. 리쾨르가 말하였듯, 우리는 광야 한 가운데에서 뒤로 갈 수도 없고 앞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방위의 개념이 무색할 때에는 새벽별을 찾아야 한다. 나의 길은 내부의 기억도, 기대도, 직관도 아니요, 외부에서 들려오는 새로운 부르심이다. 그 부르심이 내가 된다. 

그 부르심이 내가 된다.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이 되지 못할 것이며, 내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을 피하지도 못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기호가 아니라, 저편에서 나를 잡는 어떤 손길만이 나를 내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연구가 끝나간다. 연구를 진척할수록, 학문적인 분야의 도랑 같은 것을 느낀다. 지혜라고 자처하는 것들이 발목을 잡아 볼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진창에서 뒹굴면서 그것이 학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진창에서 진주를 건져내고, 그 진창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도다. 나는 반쯤 미친 채로 학문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 고도로 지적인 분과일수록 그 강도가 심하다.  스스로의 연구가 절대적이게 되면, 그것은 처음에는 그의 발목을 잡아매지만, 결국은 그의 존재를 삼켜버린다. 

비존재성이란, 어떤 것의 결핍이나 존재하지 않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존재의 삼켜짐이며, 잡아먹힘이다. 그것을 우리는 악이라고 부른다. 

변증법적인 생각의 엎치락 뒤치락

모든 인간은 불가능성을 안고 살아간다. 내가 신앙인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 불가능성에 정주할 것이다. 그러나 추호의 거짓이 없이 말하자면, 공감의 능력은 부수적인 기능 이상의 것을 감당할 수 없다. 공감은 수단이지 절대성이 아니다. 그랬다가는 모든 개개인의 상대성이 절대화되어지며 출구가 없는 다원성으로 전락해버릴 것이다. 이미 나는 그러한 시대를 살고 있다. 모두가 목소리를 내고, 누구도 길을 알지 못한다.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토론과 협의를 하면,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을까? 가다머의 말처럼, 너는 그것을 희망할 뿐이다. 사람들은 불가능한 것을 희망하지만, 그것을 성취할 힘이 없다. 

그래서 저편에서 들려오는 말씀은 참으로 기막힌 은혜이다. 내가 그것을 주관할 힘도 권세도 없으며, 다만 스스로 유유히 고고하게 솟아오르는 스스로의 권세를 지니고 있다. (이쯤되면 거의 바르티안 같은 소리를 한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초월적인 힘이 없이 인간은 스스로의 불가능성을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한량같이 약한 나를 세우는 음성은 '너는 기막힌 사냥개이다'라는 힘찬 당부이다. 나는 이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왔고, 다행히 오늘도 이 말씀을 붙들어 생명을 얻는다. 

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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