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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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Voilà, Pannenberg!

jo_nghyuk 2019. 6. 24. 19:03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성적 인식이 도달할 수 있는 것cognitio naturalis을 믿음의 신조들articuli fidei과 날카롭게 구분했고, 후자를 다루기 위해 서론praeambula을 할애했다.  다른 한편으로 토마스는 그의 <신학대전>에서 삼위일체론을 포함한 신론을 일반적인 논의 과정 속에서 다루면서 그것을 세계의 제1원인인 신 개념으로부터 유도하고 발전시켰다. 자연신학과 초자연신학의 두 가지 인식론적 질서는 아직 완전히 구분되지 않았다. 후기 토마스주의 즉 바로크 스콜라 철학과 신 스콜라 철학에 이르러서야 자연신학과 초자연신학의 "이층-도식"이 완성되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가톨릭신학에 의해서도 비판받고 있다.

이 도식이 바로크 스콜라 철학과 구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계시신학의 상대 개념으로 재등장했을 때, 자연신학 개념의 중심적인 의미는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자연적"이라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신의 본성에 적합한" 것을 의미하지 않았고, 오히려 "인간의 본성에 적합한" 것을 뜻했다. 이와 함께 그 용어는 우선적으로 인간 본성의 한계들, 특별히 신의 초자연적 현실성과 관계된 인간 이성의 한계를 기억하게 했다. 

... 비동일성의 의식은 단지 동일성 즉 진리에 대한 앎이 반사되는 표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죄의 왜곡에 대한 신학적인 강조가 도를 지나쳐서 더 이상 인간에게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말을 건넬 수 없게 되어서는 안 된다. 죄의 왜곡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과 그 본성의 창조자 사이의 상응 관계는 여전히 존속한다. 이것은 물론 창조자가 존재한다는 조건 아래서 유효하다.

판넨베르크, 조직신학 I, 146-147, 새물결플러스.

 

판넨베르크의 개념사적 연구의 명확함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과연 역사에 따라 언어는 그 맥락과 결을 달리한다. 언어의 개념에 대한 변화의 추이를 따라가면서 이 때는 어떤 맥락에서 쓰였고, 저 때는 어떤 맥락에서 쓰였는지를 짚어보는 것은 참으로 역사적인 동시에 체계적(조직적)인 신학작업이고, 해석학적 작업이기도 하다. "비동일성의 의식이 동일성 즉 진리에 대한 앎이 반사되는 표면에서 가능하다"는 말은 리쾨르가 <시간과 이야기 I>에서 인간의 시간성과 하나님의 영원성을 비교하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해설하면서, 인간의 유한하고 연약한 시간과 변하지 않는 영원성이라는 '비교'를  통해 시간성의 한계관념을 돋보이게 하는 지점과 궤를 같이한다고 본다. 한계가 있는 것은 한계가 없는 것과 짝을 같이 할 때, 즉 비교를 통해 그 한계성을 발견하게 된다. 한계성은 무한성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동시에 무한성(또는 외재성) 덕분에 자신의 한계와 경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식으로서의 시간의식을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유는, 역사가 흐르면서 그 개념이 어떤 전경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지에서 솟아오른 형인지를 꼼꼼히 돌아보는 작업이 무뎌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개념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지 않고, 지금이라고 하는 동시대의 지평에서 솟아오른 개념과 언어를 효율적으로 일치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를 읽으며 다시금 느끼건데, 학자라 하는 이는 사람들이 그러한 '오늘'의 평균적 일상성 속에서 지나간 것들을 놓치고 맹목적으로 달려가려 할 때에, 그 물의 추이가 어떤 근원을 통해 (또는 근원이라 추정되어지는 역사적 지점으로부터) 흘러내려왔는지를 명시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작업의 무게가 어떠한지를 알기 때문에 나는 참으로 자신이 없기도 하다).

애초에 자연신학은 신 존재증명이 목적이 아니라,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학과 철학이 단 하나의 '제1원인'으로서의 신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고, 지금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적 신 인식이 "자연적인" 것은 그 인식이 인간적 본성과 이성의 원칙들과 이해 능력에 부합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 신 인식이 인간이 제정한 것에 기초하는 "실증적인" 종교 형태 속에서 일어나는 변조들과는 달리, 신적"본성" 곧 하나님 자신의 진리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 138)

 

판넨베르크는 매우 지성적인 학자이지만 늘 하나님 편에서 출발을 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십분 활용하여 변조(변주가 아니다)되어진 목소리들을 매우 차분하고 또렷하게 정돈하고, 무엇이 허망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명쾌하게 지적한다. 하나님의 진리에 상응하기 때문에, 인간이 기본적인 신 인식이 가능한 것이지 (로마서 1장을 보라)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돈을 해놓고 나니 판넨베르크 안에서는 두 가지 극이라고 여겨진 것들이 빙글빙글 돌며 조화를 이루기 시작한다. 지혜자는 다른 차원 몇 개를 더 가진 사람들인가. 아니 '받은' 사람들이겠지.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플라톤주의자들은, 비록 그들의 삼위일체론의 표현에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삼위일체를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알지 못했던 것은 성육신이었다. ... 12세기 이래로, 특히 길베르투스를 통해, 이성적 인식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체성일 뿐 그분의 삼위성은 아니라는 견해가 점점 더 지배적이 되었다. (145)

 

물론 판넨베르크의 논지는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이다. 그가 말하듯, 끝까지 가보아야 우리는 전체를 이해할 것이다. 

이게 빌 에반스야 판넨베르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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