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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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6월 27일 수기, 부드럽고 반듯하게

jo_nghyuk 2019. 6. 27. 17:24

며칠 쉬었더니 편도선이 가라앉는다. 기쁜 일이다. 아픔은 몸이 보내는 정직한 신호다.

멈춰. 

약을 먹고, 몸을 놓아두는 수 밖에 없다. 봉기를 진압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자연스러움만큼 좋은 것은 없다. 흘러가는 대로, 지나가는 대로, 놓치는 대로...

글을 쓰면서 말줄임표를 자주 쓰는 성격은 아니다. 아는 목사님은 늘 말줄임표를 글에 넣으신다. 그분에게 느릿느릿, '생활'이라는 것을 배웠다. 말을 고르면 고를수록 말이 고르게 고와진다. 그날 저녁에 또는 다음날 저녁에 자꾸 고치는 글은 정갈한 음식같이 한결 개운해진다. 말을 고르다보면 말을 꼭 줄이게 된다. 말 속에 불필요한 말들이 참 많다. 

오랫만에 예전 살던 마을을 방문했다. 할머니는 여전히 정원을 바지런히 가꾸고 있다. 저 정원은 할머니의 세계의 총체성이다. 할머니는 늘 질서와 정돈을 사랑했었다. 세계는 변화로 들끓고 있고 할머니의 정원은 포근하다. 

그러나 나는 우경화된 국가의 어느 한 산골마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괜찮지 않은 것을 괜찮다고 말하면 안된다. 그것은 나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나의 재구조화를 요청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이 괜찮게 되는 경우는 재구조화에 성공한 경우이고, 그것이 괜찮지 않게 되는 경우는 재구조화가 실패한 경우이다. 그러나 괜찮지 않으면서 재구조화가 되는 '괜찮아보이는 실패'도 있다. 그것은 장기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내 안의 타자가 된다. 릴케의 경우 그것은 두려움이었고 질병이었을 것이다. 

회복탄력성이 허용되는 한에서 재구조화를 해야 한다. 계획처럼 따라와주지 않는 몸은 타자이다. 산을 깨고 바위를 터뜨리고 물길을 바꾸어도, 자연은 우리의 타자이다. 끌려올지는 몰라도 그게 자연 상태가 될 수는 없다. 언젠가는 느릿느릿,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모든 것은 제 자리로 돌아간다.

어떤 사람의 길은 어떤 시인의 비유처럼 풀어진 넥타이 같을 수도 있다. 어떤 이의 길은 반듯한 직선도로이다. 내 자신의 자유와 감각의 총량이 너무나 커서, 나는 나에게 꽤나 엄격한 편이다. 원칙주의자가 될 때가 종종 있다. 그게 먹힐 때도 있고, 그게 malfunction할 때도 있다.

물 속의 물고기처럼, 양지 위의 잉크처럼 부드럽고 반듯하게 잘 풀어졌으면 좋겠다.

뉴올리언즈는 너무 달다. 싱글 오리진을 시킬 걸 (하던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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