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6월 28일 수기, trans-quility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6월 28일 수기, trans-quility

jo_nghyuk 2019. 6. 28. 20:24

equilibrium은 본래 라틴어로서, 평형을 뜻하는 단어이다. equal이라는 말은 동등한, 같은,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여기에 초월성을 뜻하는 접두어인 tran(s)를 붙이면 tranquility, 즉 평정, 고요함, 냉정 등을 의미하는 합성어가 된다. 

그러니까 equilibrium은 실재하는 것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어떤 일치점을 지향하고 있다면, tranquility는 그것들의 조화와 균형이 어그러진 상태에서도 태연자약하게 또는 냉정하게 일관된 상태로 진행해가는 의미를 겨누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trans를 초-로 본다면 당연히 위로부터 오는 초월성의 힘으로 느껴질 것이고 어떤 것이 전이하는transitional 상태, 즉 전이적- 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시간과 역사에 대해 횡단적이고 경험적인, 레비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통을 겪는 과정을 포함하는 것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런데 그 둘은 꼭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갈라져야만 하는 개념인가? 하는 질문이 들곤 하는 것이다: 영원이라고 하는 것이 시간에 돌입했을 때에는 시간에 마치 탄젠트 곡선이 접점을 스치듯 가지면서 지나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영원이 시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도래하다'라는 단어가 가진 초월성과 내재성을 모두 포함하는 원의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본인 조직신학 교수님은 그 초월과 내재를 합쳐 내월이라고 표현하고 싶어했는데, 얼마나 시적인지. 

아픔을 겪지 않는 초월성은 우상이다. 참된 초월성은 내재성의 고난과 아픔을 자기 자신 안으로 수용한다. 리쾨르의 표현처럼 하나님이라고 하는 절대자가 아버지라고 하는 관계로 들어오는 종교는 그래서 더욱 고차원적인 종교이다. 그 전이적 과정 안에 '계시'라는 마디가 반드시 들어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스스로 쓴 일련의 글들을 읽어내려가면서, 다소 건방지고 애늙은이스러운, 말하자면 거슬리는 표현들이 있어서 다시 고쳐 작성했다. 아아, 벌써 다른 사람들이 읽었을텐데, 아무튼 죄송합니다. 나도 모르게 자의식이 커지면 나는 그렇게 팽창하는 휘브리스hybris를 은근히 부리곤 한다. 다른 사람들이 소셜 네트워크에 그런 휘브리스 자랑질을 하면 그리 거슬려하면서 스스로의 소화불량에는 이다지도 둔하단 말이냐. 페이스북에 글을 올릴 때에는 온갖 겸손질을 다 떨더니, 조용한 숲에서 혼자 살듯이 글을 쓰니 소로우가 된 마냥 시건방을 떠는 모양이다. 그래서 반성적 의식은 나와 너의 다단한 관계망으로 나아갈 때만 가능해지는 거울이자 유리창이다. 나는 소탈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좋아하면서, 스스로는 오만해질 때가 많고, 정작 소탈하고 겸손한 척은 다 떨며 은근한 영광과 사람들에게서 오는 사랑을 차지하고 싶어하는 때가 참 많다. 

스스로를 지나치게 몰아세우는 이런 엄중함도 돌려놓고 보면 지극한 나르시시즘일 수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혐오와 나르시시즘은 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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