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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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7월 17일의 수기, trés tre trois personnes

jo_nghyuk 2019. 7. 18. 04:05

드디어 파리에 왔다. 짧은 이탈리아어를 말하면서 생각보다 프랑스어와 섞이지 않는 것을 보고 인간의 뇌란 참 신기하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말하려 보니 모든 것이 희미해져 있었다. 마르모탕 미술관 티켓을 세 장 주문하려는데 trois personnes가 아니라 tre personnes라고 말해버렸다. trés personnes? 참으로 인간적인?

세느강 옆의 아파트를 숙소로 잡았는데 동네가 너무 차분하고 좋아서 아침에 미술관까지 산보하듯이 걸어갔다. 도착한 첫날 밤에 편의점인monoprix에 가서 비싼 가격에 화들짝 놀라서 물 몇 병만 사들고 돌아왔는데 오늘은 근처에 Lidl이 있는 것을 보고 삼겹살과 새우를 사와서 구워 먹고 커피까지 내렸다. (역시 독일!) 주방이 있으니 아침 저녁을 장을 보고 점심을 프로방스풍의 바게뜨 따위로 해결하니 돈이 꽤나 절약된다. 우리는 이 페이스대로 마지막 날까지 버텨서 저렴한 프랑스 가정식 요리를 먹자는 야심찬 기획을 하고 있다.

그냥 자연스러운 게 제일 좋은 듯 하다. 남들이 하는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발길 가는대로 발걸음을 적당히 잡아주는 거. 서로가 원하는대로 배려해주면서 내 것이 좀 부족해도 없으면 없는대로 섬김에 만족하는 것이 이번 여행에서 내가 배우고 있는 것들이다. 숙소 근처 골목들을 걷고, 커피를 한 잔 사 마시고, 빵을 뜯어먹고, 걷다 지치면 버스를 타고, 냉장고에서 찬 물을 꺼내 마시고, 읽을 거리들을 읽고, 기도하고 다시 하루를 맞이하는 리듬의 자연스러움이 좋다. 그 자연스러운 것들의 리듬을 잘 지켜주어야 영성도 지성도 감성도 보호를 받는다. 집에 기타가 있고 없고는 내 영성 생활에 큰 차이를 가져다 준다. 느리게는 하지만 헐렁하게 되는 것은 좀 그렇다.

가족과 여행을 하며 스스로의 성미라든가 기질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이런 나를 정향해주는 아내의 지혜를 재발견하는 중이다. 왜 좀 더 가까운 사람들에게 부드러울 수는 없는 것일까, 더 관용적이게 되고 보호해주는 큰 그릇이 먼저 되어줄 수는 없는 것인가. 이것도 스스로의 공력의 한계임을 절감한다. 기도가 줄으니 성품도 옹졸해진다. 나는 너를 지키기 위해 내 영을 먼저 지켜야 한다.

어머니가 자꾸 저녁 산보를 나가고 싶어하셔서 한 시간을 또 강변을 걷다가 버스를 타고 들어왔다. 노트르담을 복구하듯이 나란 작자도 좀 보수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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