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8월 2일 저녁설교, 누가복음 1:39-80 본문
8월 2일 월요일 저녁예배
찬송 301장 통 460
- 지금까지 지내온 것
말씀 누가복음 1:39-80
- 하나님의 공평하심, 긍휼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9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66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마리아는 가브리엘이 엘리사벳 또한 아이를 밸 수 없는 중에 배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엘리사벳에게로 향합니다. 당시 엘리사벳은 이미 임신 6개월차였습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하는데 그 문안소리를 듣고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뛰놀기 시작하였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태아가 복중에서 뛰노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는 아이, 즉 요한이 이때 뛰노는 것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에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이유는 마리아의 뱃속에 예수님께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4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마리아의 뱃속의 아기를 엘리사벳은 내 주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엘리사벳에게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아직 자신이 임신한 사실도 알리지 않고 문안인사만 했을 뿐입니다. 41절을 보니 이 말은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한 예언적인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벳도 마리아도 아이를 밸 수 없는 중에 아이를 배게 된 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건은 성령으로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나누었듯 성령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어서 아이를 잉태하였고 엘리사벳도 그러합니다. 지금 엘리사벳의 예언도 성령의 충만으로 나갑니다. 엘리사벳 뱃속의 아이 요한도 성령의 충만으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뛰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성령님의 역사하심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칭하는 45절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우리는 아침에 누가복음의 1장 1절과 38절, 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주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동일한 구절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고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믿은 마리아는 참 복이 있구나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높아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비천한 여종이라고 48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우리의 믿음을 칭찬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우리가 보여야 할 마음의 태도는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는 성령으로 본다고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일을 믿는 이 믿음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 믿어서 이렇게 되었다라는 마음을 우리는 그래서 늘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역사는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끝나는 것이지, 성령으로 시작해서 내가 도와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고백에서, 그리고 누가의 기록에서 우리는 반복되는 단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긍휼하심"이라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잉태하게 된 것은, 자신이 믿고 복을 받은 것은 "주의 긍휼하심"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역사를 보십시오. 그 긍휼은 가장 먼저 50절이 말하듯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미칩니다. 그리고 주의 긍휼은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를 낮추십니다. 주의 긍휼은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십니다. 이 긍휼은 하나님의 공평하심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말하는 평등개념과 다른 점은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그리고 자신이 받을 자격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을 주시는 공평이라는 점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가진 것들에 대해 자랑하는 자들, 자신의 자격처럼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주신 복을 거두어가시는 것이 또한 하나님의 공평하심입니다. 모든 복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마리아는 54절에서 그 종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은 사실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의 상태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서들을 보면 후기로 갈수록 우상숭배가 어찌나 심각하던지 주의 성전이 있는 곳에서도 죄가 자행되고 거룩한 것이 있어야 하는 장소에서 가장 더럽고 음란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것을 탈취하는 데에 급급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은 사실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정의의 원칙에 따르면 이들은 하나님에게서 끊어져야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은 이런 이들을 다시 아버지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는 데에 있습니다. 회개가 있어서 긍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있기 때문에 죄인의 회개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긍휼, 특히 낮고 천한 자들에게 임하는 긍휼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엘리사벳의 남편 사가랴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아 벙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성령이 충만하여 뱃속의 아기 예수와 세례 요한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때 사가랴는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할 때 사가랴는 여전히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놓여 있는 것입니다. 가장 명망있는 신분인 제사장은 믿지 않아 침묵하고 있고,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 중 하나인 여성들이 성령충만의 현장의 중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평은 믿는 자를 귀히 여기시는 공평입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사가랴도 그 믿음의 고백 가운데로 들어옵니다. 누가복음 1장의 후반부는 사가랴의 회복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친척들이 아이의 이름을 지으려고 하는데 전통에 따라 명망있는 이름인 아버지의 이름 사가랴로 지으려 할 때에 사가랴는 서판에다가 요한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그리고 그 순간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다고 64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가랴의 믿음이 사가랴의 입을 열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가랴의 입을 왜 막으셨는지 우리는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불신앙의 말들이 입에서 나오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가랴의 입을 막으시고 오히려 당시 사회에서 발언권이 전혀 없었던 여성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양으로 누가복음 1장을 가득 채우십니다. 우리의 입에서는 어떤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까? 마리아처럼 믿음의 고백과 찬양과 감사가 나오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신앙과 불평과 죄의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까? 사가랴는 10개월동안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불신앙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다시 입이 열리고 나서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찬송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67절에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였다고 기록합니다. 단순히 우리의 입에서 고운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하여져야 입에서도 신앙의 언어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우리 모두 우리의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와 함께 기쁨의 찬송을 부르던 그 천국 잔치에 우리들도 함께 들어가 참여하여 주의 복을 넘치도록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