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8월 9일 아침설교, 누가복음 6:13-26 본문
8월 9일 월요일 새벽기도회
찬송 94장 통 102
-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말씀 누가복음 6:13-26
- 복이 있는 제자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14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오늘 이 복과 화에 대한 모든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12 제자를 부르신다. 이는 단순히 12명을 부르신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12명의 수가 상징하는 완전함에 더 집중해야 한다. 12제자를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각양각처에서 부르심을 의미한다. 19절이 고백하듯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했다"고 고백한다. 주께 나아오면 모두 치유를 얻는다. 주의 능력과 자비는 "넘쳐흐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로부터 나와서 부르심을 입은 모든 백성들을 향하여,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넘쳐흘러 이방까지 향한다.
제자들 중에는 가난한 자도 있고 부한 자도 있었다. 세례 요한이 낮은 골짜기가 메워지고 높은 산이 평탄해진다고말하듯이, 예수님은 부한 자는 낮추시고 가난한 자는 높이실 것이라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모든 것이 부요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한 종의 형체로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낮추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보이는 모든 행적들은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며 그와 닮을 것을 요구하신다. "나를 따르라"는 제자들을 향한 명령은 "나를 닮으라"라는 명령과 같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에게, 그리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박해를 받는 이들에게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위로를 받고 배부름을 얻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여기서 등장하는 "가난"은 절대곤핍의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의지하지 않고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삶, 그래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이 "가난한 자"의 삶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같은 구절을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표현하였다. 영적으로든 육적으로든 가난한 자는 자기 자신에게서 만족을 찾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오는 복을 구하는 법이다. 그리하여 가난한 자는 하나님을 늘 가까이 하고 은혜를 매일 받는 사람이므로 부요한 사람보다 복이 있는 사람이다.
"주린 자"도 마찬가지이다. 마태복음은 이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표현하였다. 주린 자는 그야말로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다. 자신이 철저히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주린 자는 복이 있다. 자신에게 희망이 없고 하나님에게만 희망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희망을 하나님에게만 두는 자는 하나님의 생수의 강에 의해 채워짐을 경험한다.
"우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해하는 자이다. 자신의 죄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버리면 은혜도 값싼 은혜가 되어버린다. 죄를 고치려는 노력을 넘어서서 자신이 철저히 죄된 존재임을 깨닫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을 때 사람은 통회하게 된다. 통회하고 자복하는 것은 죄를 합리화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죄인임을 인정하며, 이 죄에서 떠나게 해달라고 우는 자는 그래서 복이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 중에 부요한 이들에게는 반대로 화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 땅에서 부요함을 추구하는 이들, 이 땅의 즐거움을 찾는 이들, 이 땅에서 사람의 칭찬을 구하는 이들은 화가 있을 것이라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공평하신 하나님은 낮은 자를 높이시고 높은 자를 낮추시는 심판자이기 때문이다. 부요함 자체를 공격하신 것이 아니라 이웃과 나눔이 없는 축적된 부를 비난하신다. 즐거움 자체를 부인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닌 이 세상의 즐거움을 계속 추구하는 자들을 책망하신다. 사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영에 엄청 굶주린 상태이다. 그러나 죄인은 하나님으로 영으로 자신을 채우려하기보다는 손쉽게 세상의 것과 자신의 욕심과 정욕을 채움으로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욕체적 만족을 꾀한다. 이 즐거움은 자기 중심적 즐거움이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 부요함과 자기 중심적 즐거움, 그리고 자기 중심적인 칭찬받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게 막는 것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부요함과 즐거움, 칭찬받음은 그 사람에게 화가 되는 것들이 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찬송가에서 고백하듯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쫓는 삶이다. "세상 자랑 다 버리고" 따르는 삶이다. 찬송가는 고백한다. 그 이유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제자의 길을 제시하셨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지금 주린 자가 복이 있으며, 지금 우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따르고 즐겁고 부요한 길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을 따르며 동시에 자기 중심적으로 살 수는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지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하고, 세상의 것을 버려야 한다. 사실 그래서 예수를 따르기 때문에 가난하고, 애통하고, 박해받는 일이 더 많이 생겼던 것이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의 상황이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결코 부요해지는 길이 아니다. 가난해지는 길이다.
웃는 길이 아니다. 예수를 따르게 되면 세상 속에서 웃기보다는 울게 된다.
세상과 거꾸로 가야하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만난다. 때로는 사람의 박해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악인의 장막에 부요히 살기보다 내 하나님 성전의 문지기가 되기를 구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늘 기도하고 주께만 희망을 두고, 가난한 심령과 애통한 마음으로 늘 주를 붙들기를 원하신다.
세상에서 부요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린다면 복된 삶이 아니다.
세상에서 즐거워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놓치면 복된 삶이 아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그러나 영적으로는 하나님에게 책망받는 자이면 복된 삶이 아니다.
우리의 복은 하나님을 만나는 삶이다.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의 인생이다. 바라건대 오늘 하루도 주께서 나의 삶을 다시리시는 주인이 되시고, 주님의 나라가 나의 현실이 되기를 함께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