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8월 6일 아침설교, 누가복음 5:17-39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8월 6일 아침설교, 누가복음 5:17-39

jo_nghyuk 2021. 8. 9. 16:55

8월 6일 금요일 새벽기도회

찬송 302장 통 408

  •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말씀 누가복음 5:17-39

  • 복음의 기쁨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누가는 예수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치유 사역을 함께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의 표현에 따르면 그 능력이 예수님이 항상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기보다, "주의 고치는 능력"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누가복음을 읽으며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셨음을 늘 보고 있죠. 주의 고치는 능력의 성령의 능력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시는 사실은 성령의 힘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우리에게 바깥으로부터 임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누가는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그 주의 능력이 임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회복될 때에 치유의 능력이 일어남을 누가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치유의 능력을 보고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지붕을 뜯어서 침상째 예수 앞으로 달아 내립니다. 이러한 적극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고쳐주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20절에서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는 중풍병자가 믿었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침상에 달아내린 사람들의 믿음을 예수께서 보셨음은 확실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통해 볼 수 있는 사실이 무엇일까요? 믿음으로 드리는 중보, 중보기도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16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기도하는 것은 서로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기도를 포함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은 믿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 위해 기도하고, 주가 역사하실 줄로 믿으면 그 믿음에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 예가 바로 오늘 중풍병자를 달아내린 사람들의 중보의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와 마찬가지로 누가복음도 이 병자의 죄의 문제를 먼저 다루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육체의 질병보다 영의 질병인 죄를 먼저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시급한 구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0절에서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죄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죄를 심판할 권세가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사할 권세도 있습니다. 그 죄사함의 선포 이후에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니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사실이 됩니다. 그가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25절은 말합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도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후에 나가셔서 레위라 하는 세리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세리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창녀와 같은 죄인 취급을 받던 존재였습니다. 누가복음 초반에 세례 요한에게 세리가 나아왔을 때 요한이 사람들에게서 착취하지 말 것을 경고했듯이 이들은 과다한 세금을 사람들로부터 착복하는 이들이었습니다. 레위라 하는 세리는 예수를 따른 뒤에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벌입니다. 이때 또다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시비를 겁니다. 그것은 "어찌하여 죄인과 같이 먹고 마시느냐"는 것입니다.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적대감을 버리고 상대와 친구가 됨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분리주의자"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거룩을 내세우며 분리주의적인 영성을 추구했습니다. 세리나 창기, 부정한 자들과 죄인들을 멀리했습니다 그런 이들의 눈으로 보기에 예수님은 지금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2절) 예수님은 온 세상 사람을 위해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 사람이 죄에 빠져 어둠의 권세에 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에 있어서는 바리새인이 가장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의 형식으로 죄를 가리울 뿐,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세리와 창녀들"이 가장 먼저 들어갑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회개를 하는 것이고. 회개를 할 때만 죄사함을 얻고 거룩함을 선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 앞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왜 요한의 제자는 금식하고 기도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느냐 이겁니다. 이 말은 그들이 얼마나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금식은 애통하며 회개할 때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 기뻐해야 할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사해주심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신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혼인잔치의 기쁨이라 비유하시고 금식이 아니라 기뻐해야 하는 때라 말씀하십니다. 죄인과 세리가 예수님의 신부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아들 딸로 회복되었는데 왜 잔치를 기뻐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36절에서 새 옷과 헌 조각의 비유를 합니다. 새 옷은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복음이고 헌 조각은 율법입니다.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면 새 옷도 버리고 낡은 옷에도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37절에서는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의 비유를 드십니다. 새 포도주는 옛 율법과 구별되는 새로운 복음입니다. 낡은 율법과 달리 복음은 하나님이 새롭게 부어주시는 놀라운 기쁨입니다. 포도주는 이스라엘에서 기쁨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위해서는 새 부대를 준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율법에 사로잡힌 형식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부대와 같이 새로워진 마음과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은혜는 형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형식을 지키는 것보다 사람을 살리는 것, 한 사람을 빛으로 돌아오게 하고 살아나게 하는 것에 하나님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관심 또한 율법을 잘 지키는 훌륭한 종교인이 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차라리 중풍병자처럼, 세리처럼, 예수님 한 분에만 갈급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주의 천국잔치에 참여하고 그 복음이 주는 엄청난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것이 복음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뜻입니다. 다윗이 고백합니다. 내가 사람들에게서 아주 비천해지고 낮아질지라도 나는 주님 앞에 힘을 다해 기뻐하겠다. 이러한 어린아이와 같은 깨끗한 심령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오늘 하루를 주 안에서 순수한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으로 예배하며 살게 하여달라고 기도합시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