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8월 9일 저녁설교, 누가복음 6:27-36 본문
8월 9일 월요일 저녁예배
찬송 40장 통 43
-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말씀 누가복음 6:27-36
-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0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심령이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마음이 애통하며,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 성경이 "원수"라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1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는 세 그룹이 등장합니다. 가장 먼저는 원수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미워하고 저주하며 모욕하며, 뺨을 치고 겉옷을 빼앗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원수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이 너희를 미워할 때에 선대하며, 그들이 너희를 저주할 때에 축복하며, 그들이 너희를 모욕할 때에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너희의 뺨을 때리면 저 뺨도 돌려대며, 겉옷을 빼앗을 때에 속옷까지 즉 다 빼앗기는 것도 거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이러한 길을 제시하실까요?
정의의 원칙을 따르면 구약에는 동해보복법이라는 하나님이 지으신 율법이 있습니다. 그 율법은 해를 입으면 동일하게 돌려주는 율법입니다. 나의 눈을 상하게 하면 동일하게 눈을 상하게 하여 갚고, 나를 때리면 동일한 수로 때리는 것이 동해보복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동해보복법이라는 권리를 포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상대가 나의 이뺨을 치면 나는 상대의 같은 뺨을 치는 것이 권리인데, 오히려 나의 저뺨을 대라고 하십니다. 내 겉옷을 빼앗으면 상대의 겉옷을 빼앗거나 최소한 더 빼앗기지 않도록 나를 지켜야 할 터인데, 오히려 속옷까지도 내어주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어려워보이는 명령을 하실까요?
사실 동해보복법,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이 법은 복수를 제어하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보통 피해를 입은 사람의 심리는 맞은 대로 갚아주기보다 배로 갚아주려 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는지 너도 겪어봐, 하면서 더 아프게 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동해보복법을 통해 이러한 지나친 앙갚음을 제어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경각심을 주어 상대를 해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동해보복법의 의도는 나의 것을 지키고 상대의 것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숨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것을 상대에게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웃을 나의 죄악으로부터 지키시기 위해 이 법을 통해 이웃을 지키시려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나를 지키는 것"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내어주는 것"에 예수님은 집중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권리까지도 포기하는 사랑으로 이웃을 대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2
우리가 이 말씀 앞에 여전히 "저는 제 마땅한 권리까지 포기하면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두번째 그룹에 속하게 되는데, 그 그룹은 죄인의그룹입니다. 32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하나님과 화해되지 못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들은 언뜻 보면 참 균형잡힌 관계를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해주고, 나를 잘 대해주는 사람을 잘 대해주고, 내가 무언가를 줄 때는 그것을 받기를 바라며 베푸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해된 사람, 즉 값없이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입고 죄가 가리워지고 빚이 탕감되고 허물이 가리워진 사람은, 마치 자기에게 그렇게 대해주신 은혜로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계산하면서 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침에 제자가 되지 못한 사람의 특징을 "자기 중심성"이라고 설교했습니다. 자신의 부를 축적하고 나누지 않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즐거움을 추구하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내 자아를 채우고자 하는 이 자기 중심성은 죄인의 특성입니다.
그 반대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인"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죄인의 반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인 개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의인은 상당히 우리 시각에서 균형이 잡혀 있는, 그래서 어느 정도 나누어주고 나에게 해를 입히는 자에게서 나를 지키고 악한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이러한 의인은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더 가까운 모습입니다. 이러한 의인은 예수님과 충돌합니다.
3
그래서 이제 세번째 그룹이 등장합니다.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예수님께서 "너희"라고 부르시는 이 세번째 그룹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36절은 "너희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표현하십니다. 이 말은 이 그룹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주의 자녀들을 의미합니다. "
유대계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용서를 가리켜 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 초자연적 능력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냥 자연적인 인간으로 산다면 우리는 당한대로 갚아주고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연쇄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이런 자연스러운 연쇄반응의 사슬을 끊어버리는 초월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사람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인에게도 속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하나님에게 속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용서가 얼마나 하나님의 거룩하고 놀라운 능력인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고 원수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죄인과 원수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이 구절의 자비하심을 "온전하심"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온전하심이기 때문입니다. 또 "자비하심"은 내가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상대에게 베푸는 행위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는 "선물"의 개념과 하나님의 "선물"의 개념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물을 하면 어느 정도 보답으로라도 그에 대한 표현을 할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은 돌려받는 것과 상관없이, 오히려 그것을 기대하지 않고 그저 베푸는 "은혜"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값없이 내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자격없는 자에게 값업이 귀한 것을 내어주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4
성경이 말하는 그저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처럼, 그저 예수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것을 실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용서와 거저 내어줌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능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를 강조하기보다 "너희 아버지"를 강조하십니다. 나의 제자됨을 의지하여서 하는데에는 한계가 있지만 나의 아버지를 의지하면 우리는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 성령의 행하심 안에 우리의 제자된 순종도 포함됩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 즉 자녀의 영을 주시면 우리는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자비하심을 좋아하게 되고, 사실은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궁극적인 하늘의 복이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땅에서 다소 힘들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의 소망은 이 땅에 있지 않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이 땅의 법칙 위에 있는 하늘의 법칙을 따를 수 있는 것이며,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우리 모두가 주의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여서 하늘의 축복을 나와 이웃이 함께 누리게 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