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8월 11일 저녁설교, 누가복음 8:22-39 본문
8월 11일 수요일 저녁예배
찬송 288장 통 204
-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말씀 누가복음 8:22-39
- 유일한 솔루션
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26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마을에 알리니
35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 들렸던 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를 본 자들이 그들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그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오늘 오후에 도서관 옆자리에서 공부하는 한 사람이 도움을 요청했다. 토고에서 온 연구자인데, 컴퓨터가 어제까지 잘 되던 인터넷 신호를 잡지 못한다는 거였다. 윈도우의 문제해결 란에서 문제해결을 누르면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나오는데, 아이러니하게 이 사람의 문제는 그 인터넷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씨름을 하다가 작업줄 표시란에 충돌 표시로 느낌표가 카스퍼스키 백신 프로그램에 있는 것을 보았다. 백신은 방화벽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신호를 차단하는 경우가 있다. 이전에 내 컴퓨터에서도 백신 프로그램이 충돌해서 인터넷이 막혔던 것이 생각이 났다. 작업표시줄에서 강제로 백신을 종료하고, 다시 문제해결 버튼을 눌렀다. 인터넷 신호가 다시 잡혔다!
나는 이 경험을 하고 오늘 선정한 본문 구절의 의미를 묵상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귀신들린 자를 격리시켰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했다고 나온다. 사람들이 그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도시 바깥으로 쫓아냈을 것이다. 그에게는 많은 귀신이 들려있었는데 그 귀신의 힘을 사람들은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방법은 방화벽을 설치하듯이 이 사람을 도시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의 생명의 회복보다는 자신들의 안전에 관심이 더 가 있었다. 그래서 이 사람을 무덤에 거하도록 방치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 사람에게는 문제해결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귀신 들린 자 자신이었다. 나는 이전에 살던 집에서 이사를 결정하고 나를 소음으로 괴롭게 하던, 대마초에 중독되어 있고 우울증을 겪던 이웃집 사람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를 용서해주었다. 다만 우리가 어떤 아픔을 겪었는지를 설명해주었고, 앞으로 잘 거주하려면 음악을 크게 듣지 말고 이웃을 배려하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사람은 그때 이런 말을 했다. '지금까지 나와 대화를 해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그것을 듣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 진작부터 커뮤니케이션을 해주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사람이야말로 예수의 복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서야 내가 고통을 받고 있을 때에도 그를 위한 긍휼의 마음과 그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라고 마음을 주신 예수님의 뜻이 이해가 되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고, 또 귀신들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일을 예수님의 복음전파만큼이나 비중있게 누가복음에 기술하고 있다. 예수님의 긍휼하심에 대해 누가는 집중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참되게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고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치유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과 다름을 누가는 또 묘사하고 있다. 한 영혼을 고치기 위해 돼지 떼가 몰사하는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사람들은 그 방법을 좋아하지 않아 예수를 그 도시에서 떠나도록 간청하였다. 성경에는 예수를 두려워하여라고 표현되는데 이 두려움은 경외의 두려움이나 "나는 죄인이니 나를 떠나소서"의 거룩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자신들에게 손해를 입힐 것을 두려워하여 떠나실 것을 간구한 것이다.
컴퓨터와 충돌한 백신 프로그램을 지우고 나서야 문제해결 프로그램이 작동하듯이, 우리가 생각하는 틀에 갇힌 사고를 벗어나야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로 최대한 안전한 방법과 경로를 계산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경로를 벗어난 일을 행하시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신다. 돼지 떼가 몰살해야만 했다. 이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야만 이 사람이 다시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될 수가 있었다.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의 컴퓨터를 고치면서, 컴퓨터가 솔루션을 찾을 수 없다는 창을 띄웠던 것이 생각난다. 컴퓨터의 솔루션은 컴퓨터에게 있지 않다. 그 컴퓨터를 잘 아는 사람에게 솔루션이 있고, 더 정확히는 그 컴퓨터의 구조와 프로그램들의 역학을 이해하는 개발자에게 솔루션이 있다. 우리 인간의 솔루션은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오늘 누가복음은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식대로 우리의 유익을 지켜가면서 또는 세상과 타협해가면서 솔루션을 찾는다. 그러나 누가는 말한다. 사람들에게는 솔루션이 없다. 사람을 지으신 창조주에게만 솔루션이 있다.
오늘 이야기가 있기 전 22-25절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풍랑과 파도를 잠잠케 한 일화를 다룬다. 사람들은 놀라서 묻는다: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도 순종하는가"
이 예수님은 바람과 물의 창조주이시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물과 세계를 지으신다. 잠언을 보면 지혜이신 말씀이 모든 세계 창조의 근원이라고 나와 있다. 요한복음을 보면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말씀이신 예수님으로, 그 지혜의 근원이신 예수님으로 세상을 지으셨고, 바람도 물도, 사람도 지으셨다. 어둠도 귀신도 주님의 손 안에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도 순종하는가?"라는 25절의 질문은 바로 이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고백으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는 일화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누가에게 있어 예수님은 치유자로서 구원자이시다. 예수는 우리를 고치실 수 있는 유일한 솔루션이시다. 우리 또한 내 삶의 문제의 솔루션을 나에게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다르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에게서 찾을 때 39절이 고백하듯이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시는 큰 일"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의 큰 일을 우리 삶에서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을 보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