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1월 7일 저녁기도회, 누가복음 22:47-71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1월 7일 저녁기도회, 누가복음 22:47-71

jo_nghyuk 2022. 2. 7. 05:04
1월 7일 금요일 저녁기도회
찬송 350장 (통 390)
  • 우리들이 싸울 것은
말씀 누가복음 22:47-71
  • 이것까지 참으라
 
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63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66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67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70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71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유다가 다가옵니다. 그리고 예수께 와 예수께 입을 맞춥니다. 제자가 스승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은 존경의 인사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더이상 예수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유다가 생각한 하나님 나라와 예수는 맞지 않았습니다. 노선을 달리하면 그만인데, 유다는 예수를 파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유다는 왜 예수를 팔았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미움의 감정을 봅니다. 나와 다르다, 에서 그치지 않고, 유다는 예수를 팝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지만, 유다는 예수님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만의 악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조금은 신비한 표현으로 유다에게 마귀가 들어갔다고 표현합니다. 
저는 이전에 사역하던 교회에서 목사님께서 기도하지 않으면 마귀가 역사한다고 설교하실 때 아 좀 심하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럼 내가 마귀인가?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데 마귀가 역사하지 않는다고 하면, 역으로 그것은 더 교만한 생각이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와 마귀의 나라의 싸움입니다. 내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편에도 속하지 않지만, 마귀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하면, 나는 하나님이나 마귀만큼 권세가 있다는 구조가 됩니다. 제 3의 지대가 있다는 것은 그만한 힘을 내가 가졌다는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하나님만큼 권세를 가지지 못할 뿐더러, 마귀만큼의 권세도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지 않으면, 유혹에 빠지고, 시험에 들어 마귀의 종노릇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유다의 무리들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옵니다. 제자들은 가지고 있던 검 두자루로 싸우려 합니다.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렸다고 50절은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앞서서 감람산에서 칼을 준비하라는 말은 육적인 싸움을 하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로 영적 전쟁을 준비하라는 의미에서 칼을 준비하는 은유를 드신 것입니다. 마귀가 다가올 때, 마귀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치열하게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중 하나가 적의 귀를 쳐서 떨어뜨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분명 영적 전쟁을 말씀하셨고, 이제는 검을 준비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적인 그 사람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답은 명확해졌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싸움은 누군가를 상하게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누군가를 다치게 하거나 상하게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상하고 다친 것은 오직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의 가장 은밀한 비밀입니다. 영적 전쟁의 승리는 원수 사랑에 있고, 우리들 중 누구도 성공하지 못하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원수를 사랑하십니까? 사랑은 용서보다 적극적인 개념입니다. 관계의 회복을 넘어서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돌보는 것이 사랑이고, 그에게로 향하고 싶은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원수 사랑 계명에 모두 실패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중립적인 원수 사랑만을 합니다. 미워하지 않는 선에서, 분별이라는 미명하에 사람을 판단하면서, 적당한 온정을 베풀고, 내 마음에 미움의 싹을 잘라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쓴 뿌리는 뽑아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원수사랑은 사람이 행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권세입니다. 원수사랑이라는 무기는 마귀의 나라에는 없고, 하나님 나라에만 있는 가공할 만한 폭탄과 같습니다. 사랑의 원자폭탄이라 불리는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새로운 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원수사랑을 사람들은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렀습니다. 이 무기를 누구도 막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원수 사랑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결코 십자가에 쉽게 달리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죽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분투하며 기도하셨을까요?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소서. 는 죽음을 면하게 하소서의 기도일까요? 
어떤 사람은 적을 죽일 수 있으면 자살공격까지 감행합니다. 미움은 자신을 멸해서까지 원수를 멸하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는 격렬한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도왔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처럼, 땀을 땅바닥에 쏟으며 울부짖으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원수를 이기셨습니다. 원수 사랑을 통해, 진정한 원수인 마귀를 이기셨습니다. 
이 능력이 보여지는 대목이 바로 원수의 귀를 고쳐주는 대목입니다. 자기를 잡으러 오는 자를 성하게 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라 원수 사랑입니다. 원수에 대한 긍휼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를 향한 관용이 아닙니다. 원수인 우리를 향한 사랑이며, 철저한 죄인인 우리를 향한 화해입니다. "내가 죽는다. 네가 살아라"
 
예수님은 원수 앞에 놓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이렇게 불의한 것도 참으라.
여러분에게, 저에게 예수님이 원수 앞에서 "이것까지 참으라" 하면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것까지 참을 수 있을까요?
 
보통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친 사람으로 베드로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에서 말하지는 않지만, 성경을 이야기할 때에, 많은 이들은 베드로를 등장시킵니다.
베드로의 충성된 열정, 다르게 말하면 그의 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충성된 열정과 혈기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지 못합니다.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열정과 혈기는 열심을 위한 에너지이지만, 자기 부인을 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 열정과 열심의 에너지는 철저히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그의 열정은 마귀의 권세 앞에서 속수무책입니다. 그는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리기 시작합니다. 밤이 새도록 희롱을 당하십니다.  예수님은 공회에 서기 전날 밤, 밤새도록 희롱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십니다. 밤새도록 원수의 조롱을 참으십니다.
우리는 열왕기하 2:23-24에 나오는 엘리사 이야기가 이와 매우 상반되는 결과를 가짐을 봅니다. 
벧엘 길로 엘리사가 행하는데, 어린 아이들이 나와서 엘리사를 희롱합니다.
이 대머리야, 올라가라. 이 대머리라 저리 꺼져라.
그 다음 구절은 엘리사는 그 아이들을 저주하였고, 숲에서 곰 둘이 나와 그 아이들을 다 찢어죽였다고 나옵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원수를 제거할 능력이 있었고, 권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권세와 능력으로 어린 아이들을 다 찢어죽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린 아이들이, 애들이 아니라 장성한 청년들이라고 주장하며 엘리사가 잔인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자신이 당한 저주만으로 사람들을 찢어죽인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당한 것이 아니라, 그냥 수치를 당한 것에 대해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권능을 사용해서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권한과 권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엘리사는 잠깐의 희롱에도 참지 못하고 권세를 부려 아이들을 찢어죽였지만, 예수님은 찢어죽여야 마땅한 죄인들의 희롱 앞에서 밤새도록 잠잠하셨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예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잠잠하셨을까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예수님은 미움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미움을 넘어, 원수 사랑의 전쟁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이 수치의 길 끝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 끝에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권능이 등장합니다.
영적 전쟁의 승리의 길은 자기 부인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이며, 나를 높이지 않고 낮추는 길입니다. 미워하는 길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길이며, 원수가 못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원수의 귀를 고쳐주는 길입니다. 
로마서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원수의 머리 위에 쌓으라" 네가 심판하지 말고, 너는 축복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라. 심판은 너의 것이 아니다. 심판자가 되려고 하는 유다의 유혹과 시험을 이겨내라.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유다처럼 되지 말아라. 이겨내라. 사랑에 승리하라.
 
그리고 그 승리를 위한 길을 보여주십니다. 
"깨어 기도하라.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종은 주인보다 높을 수 없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대로 따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길로만 가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중도도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 말씀은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그 길이 쉬울까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분투하며 기도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쓴 잔, 이 쓴 것을 마시기 위해 밤새 기도하셨습니다. 
이 쓴 순종을 위해, 괴로워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잠시 잠깐이라도 나와 함께 마음을 같이 하고, 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느냐?"
"한 시간도 함께 기도할 수 없느냐?"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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