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cce homo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Ecce homo

jo_nghyuk 2022. 4. 10. 22:03

나의 사랑하는 제자이자 내가 친구라고 부르는 어떤 이는 내가 걱정되는지 이따금씩 나의 감성의 안부를 묻는다. 독일에 와서 하는 연구나 또는 영적인 사역이나 모두 지성적인, 그리고 의지적인 부분에서의 강세는 가지고 있지만 그에 따라 나의 감성적인 부분은 조용히 비활성화될 때가 많다. 그는 나를 참으로 잘 알고 있는 나의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정체성이란 이중적이어서 (또는 그보다 더욱 다원적이고 복층적이어서) 내가 인지하고 있는 나라고 하는 사건의 종합과 다른 사람이 인지 또는 인정해주는 너라고 불리우는 (이때도 여전히 너라 불리우는 2인칭의 사람은 나라고 하는 1인칭과 겹침을 경험하는데) 사건의 종합 사이의 어떤 지표 같은 것이고 밸런스 게임의 한복판에서 갈등하는 존재일 것이다. 나는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아내를 만나면서 클래식 쪽으로 좌표의 눈금이 흔들리며 어떤 운동적인 국면을 만날 때가 있다. 이때의 불안한 혹은 기분좋은 흔들림은 나를 모나드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계적인 어떤 '흐르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 말하는 '너'로서의 '나'에 대해 더 귀기울이고 싶어졌다. 그 사람은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soi même comme un autre)이다. 나는 수많은 '너'들을 관통해가면서 형성되어지는 구성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침전물로서의 나, 혹은 너라고 하는 어떤 사람이 나의 현재의 빛이 감싸지 못하는 어떤 어두운 지평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침전물로서의 나는 나를 괴롭히는 너가 된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아직 나의 현재와 화해하지 못한 이 사람은 과거의 사람도 미래의 사람도 아니다. 그 사람은 또다른 현재이며 화해되지 않은 멀티버스에 속하는 어떤 사람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들의 현재는 Raumzeit이지 어떤 균일하게 흐르는 선이라거나 지금이라고 하는 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사람과 화해하기 위해 나는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한다. 나는 글에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과 충동을 풀어주어야 한다. 고등학생 때부터 나는 내 안에 커다란 이리 한 마리가 있는 것을 보았다. 언더 씬의 한 선배는 내가 복식으로 그리고 튼튼한 성대로 랩을 하는 스타일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때까지, 내가 다른 사람에 의해 투영되어 Resonanz로서 다시 여겨지기까지 나는 나를 잘 몰랐다. 나는 스스로 이름을 부여하는 존재였지 이름을 부여받는 존재는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의 이름이 스스로 부여한 이름이겠는가. 이름지어짐은 다른 누군가가 나를 '너'라고 부를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거기에는 내가 느낀 것과 다른, 내가 차마 의식하지 못하였던 사각지역의, 그러나 여전히 내 존재라고 하는 혜성의 꼬리처럼 나에게 의식하지 못하게 달라붙어있던 희미한 어떤 새로운 사람의 정체성이 들어있다. 이야기화는 이런 이질적인 것들의 종합작용이다. 그래서 사람은 끊임없이 글을 쓴다. 그것은 자신을 풀어놓는 작업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추구하고, 발견하려 하는 몸부림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놓치고 사는 나, 내가 억누르고 사는 나, 그런 점에서 여전히 '너'로서 내 앞에 있지 못하는 어떤 사람.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그 사람이 외치고 절규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해왔다. 그러나 그래서는 온전한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