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파리에서의 수기, 20220611-0618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파리에서의 수기, 20220611-0618

jo_nghyuk 2022. 6. 20. 22:43

파리의 공기는 무겁고 부드러운 벨벳 같았다. 빼곡하게 노천 카페에 앉은 사람들, 신호등을 무시하는 사람들, 뜨겁게 타오르는 도시의 건물들. 나의 숙소는 Saint Jean-Eudes라 하는 카톨릭 수도원이었다. 방은 작았고 화장실은 복도 끝에 있었으며, 창문을 열면 길 건너편으로 육중하게 솟아오른 Sante 감옥의 담벼락이 보인다. 담벼락 위로 사람들이 소리치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수도원과 감옥과 교회와 신학부 건물은 서로 이웃하고 있었다. 나는 장염에 걸렸고 죽을 먹고 쌀밥을 먹으며 그저 낫기를 기다렸다. 상당부분을 부재한 어떤 것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보냈다. 루프트한자는 아기의 유모차를 비행기에 싣지 않았고 우리는 아이와 함께 감옥 옆의 가로수 길 사이를 거닐고 집에 돌아왔다. 어딘가로 멀리 가게 해주는 발이 묶였다. 재정도 부족했다. 채우기보다는 비워야하는 시간이었다. 더 멀리 가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그리고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오는 시간이 되어야 했다. 

2018년에 아내와 둘이 파리에 왔을 때 나는 sacre coeur 교회 안에서 돔을 올려다보며 금으로 칠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기도했던 마음만큼은 잊혀지지 않는 흔적으로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학회가 끝나고 다시 그곳을 방문했을 때 나는 동일한 마음을 다시 확인하였다. 그것은 그 동일한 마음을 재확인하는, 마음을 갱신하는re-coeur 시간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 나는 나 자신에게서 어떠한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4년 전 나는 우연의 일치인지 리쾨르Ricoeur의 책을 한 권 가져왔었다. 읽지는 못해도 도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4년이 지난 뒤 나는 지도교수와 프랑스 교수 밑에서 리쾨르의 철학을 배운 채로 이곳에 돌아왔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연속성은 나의 마음이며 나의 마음의 자취이다. 나의 문체는 내 영혼이 지나간 자취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는 사라져도 나의 자취는 남을 것이다. 지금 독일에 있는 나는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어떤 인상의 흔적으로 존재한다. 내 기억 안에도 그 도시의 공기들, 거리들, 강변들, 식당들, 카페들, 도서관, 박물관 그리고 사람이 없는 새벽의 라탱 지구를 거닐었던 인상들이 흔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학회에는 파리 대학과 벨기에 루뱅 대학, 스트라스부르 대학, 낭테르 대학 등등 많은 학교에서 온 학생들과 교수들이 있었다. 우리는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진지하게 대화를 하고 토론을 했다. 무엇보다 기본기가 되어 있는 공부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학회가 끝나고 최고의 아티클을 수상하는 시간에, 심사위원들과 재단 이사로부터 나의 아티클이 le prix d'excellence 최종심사까지 갔었다는 말을 들었다. 발제문을 작성하면서 나는 내 글에 엄정함은 있지만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깊이감의 부족을 절감했다. 그 부족함에도 심사위원들은 수상자와 나의 이름을 함께 호명하며 나를 격려해주었다. 수상을 받지 못했어도 그 격려가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동안 해온 공부에 대한 인정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날 밤에는 꽤 잠을 설쳤고, 4시에 눈이 떠져서 여명이 들어오는 시간에 나는 서늘한 파리의 거리를 한적하게 거닐며 달궈진 마음을 식히며 마지막 날 아침을 맞이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새벽 0에서 다시 출발하기로 했다. 두려움은 했던 것들을 반복하게 만든다. 그러나 호기심과 용기는 미지의 것에 도전하게 하고 자신이 만든 서클을 부수고 나가게 하는 동력이 되어준다. 예나에서의 젊은 헤겔은 늘 자기 자신에게 타자로서 존재했다. 그는 늘 자기 자신에게 대자였으며, 행복한 자기의식보다는 불행한, 그러나 운동 중에 있는 자기의식에 가까웠다. 그의 사유는 정신의 모험이었고, 그의 글에는 그의 부지런한 운동의 자취가 남아 있다. 

회개하는 심령은 모든 것을 0으로 만들기 때문에 거룩한 심령sacre coeur가 될 수 있고, 그것은 늘 마음을 새롭게 함re-coeur에 그 창조적 근원을 두고 있다. 인정 욕구는 채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늘 무한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정을 받을 대상을 유한자가 아니라 무한자에게로 지향해야 한다. 나의 마음은 나의 것이 아니며, 늘 바쳐져야 하고 불타올라야 하는 번제와 같은 것이다. 금은 반짝임을 추구하지 않고 불가마 속에서 단련되어짐을 추구할 때 정금이 된다. 그 어떤 꽃도 8일 이상 피는 꽃은 없다. 풀과 꽃의 영광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번제처럼 불타오르는 심장의 특질이다. 상번제라는 패턴을 통해 드러나는 re-coeur의 반복은 그래서 반복이 구태의연한 어떤 것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을 향하여 특별하고 새롭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타오르는, 위를 향하는 불꽃의 형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Fonds Ricoeur 길 건너에 있는 Lecir에서 콜라를 두 번이나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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