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인간의 향유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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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향유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jo_nghyuk 2022. 8. 11. 18:53

라이프치히에 다녀오면서 흰 면티셔츠를 여섯 장, 양말을 다섯 켤레 사왔다. 덕분에 색이 누렇게 될 때까지 입어왔던 면티셔츠를 몇년만에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세 장에 9유로 하는 면티를 사도 기분전환이 되고, 솟아오르는 분수대에 발만 담그고 있어도 기분전환이 된다. 사실 전환이라는 것은 거창하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굳이 마르세유나 코펜하겐 등을 행선지로 잡고 검색을 시작한다. 그러나 거창한 것들은 또다른 자원들을 소진하지 않던가. 파리 워크샵을 다녀온 것은 그것을 준비하기 위한 기간을 포함해서 물질과 에너지를 많이 소비해야 했다. 이번 달에 있을 국제 컨퍼런스 발표를 준비하면서도 나는 또 그만큼의 시간적 자원을 소비하는 중이다. 그것들은 내 논문을 위한 생산적 전환점이기도 하지만 그 생산적 전환점을 만드는 과정은 동시에 소진적이기도 하다. 언제나 직관적인 것은 아름답지만, 분석적인 것은 지난하다.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과 무언가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동질적인 개념이 아니다. 이해는 직관적인 아우름이지만, 설명은 분석적인 열려짐이며 여러 파열적 순간들을 만나게 한다. 논문을 쓴다는 것, 발표를 한다는 것 등은 나의 이해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읽거나 듣는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무언가를 치열하게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읽었던 책을 또 읽는 중이다. 

전환Umkehr은 늘 다시-인식하기Wieder-erkennen이라고 하는 되돌아가는 행위를 통해 시작된다. 다시-인식함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본원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사람은 멈춰 서서 자기가 어디쯤에 있는지를 다시 인식해야 하는데, 그것은 순수 반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처한 정황, 자신이 처한 세계, 자신이 속한 환경, 자신이 걸어오던 방향과 향하던 방향을 내용적으로 다시 살펴보는 과정을 통해서 실행해야 한다. 사람의 특징은 길을 새고, 길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길을 되찾게 되면, 잃어버렸던 길들도 전경을 풍요롭게 하는 공간적인 요소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 길을 되찾게 하는 것이 바로 표지이다. 나에게 있어서 그 표지는 글이다. 내가 써놓은 글이 내가 걸어오고, 경험한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을 다시 읽는 행위는 단순히 걸어왔던 길을 그 방향대로 걸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방향이 잘못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전에 걸어갔던 나의 방향이 아니라, 그 방향이 지시하던 어떤 것, 그 상황과 정황과 환경 너머의 것을 다시 읽어내야 한다. 그렇다면 자기-반복적 읽기를 초월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다시-인식하기를 시행할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가르침의 말씀Belehrung이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다시 인식Wieder-erkennen하게 하고, 전환Umkehr을 이루게 한다고 말한다. 과거에 내가 경험하고 돌이키게 했던 표지를 다시 찾는다면, 나는 내가 향해야 할 미래의 표지를 다시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과거에 역사하던 그 표지는 영원성에 속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는 지나가지만, 그 표지는 시간을 초월하여 있고, 있을 것이다. 사람의 말은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과거에 나는 타자를 섬김을 통해서, 새로운 방향이 열리는 것을 늘 경험하였다. 나 자신의 것을 움켜쥐지 않고, 나 자신의 계획을 관철하지 않고, 타자를 통해서 열려지는 방향으로 갔었고, 타자에게 내가 주어야 할 그 어떤 것이 내 손에 쥐어져 있음을 보곤 했다. 결국 스스로를 다시 인식하는 길은 타자의 존재를 통해 내 존재가 열려질 때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라는 절대 타자의 가르침이 나를 다시 인식하도록 나라는 감옥에서 꺼내어주고, 내가 어디 있는지를 살펴보게 했던 것처럼, (어쩌면 레비나스의 주장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타자의 얼굴을 통해서 내가 그를 향해 내가 가진 것을 소진하도록 부르시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러한 향유 옥합의 소진은 공동의 살아감의 향유함jouer을 위한 자원이 되는 것이 아닌가. 소박하지만 내가 깨야 하는 나의 향유는 무엇이며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내가 아니라 공동의 우리가 무엇을 함께 향유하기를 원하시는가. 답은 늘 내 안에 있다. 하나님의 음성은 내적으로 속삭이시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나는 늘 답을 알고 있다. 듣기만 하면 된다. 좋은 아버지가 좋은 아들을 만들듯이, 좋은 제자는 좋은 스승에게 그 좋은 가르침에 대한 영광을 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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