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7월 29일 설교, 로마서 12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7월 29일 설교, 로마서 12장

jo_nghyuk 2022. 7. 29. 00:56
7월 29일 목 새벽기도회
찬송: 425 통 217
  •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말씀: 로마서 12장
  • 주님을 머리로 하는 다양한 지체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다양한 믿음의 분량을 주셨습니다. 각자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은 다양한 은사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믿음 자체도 은사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도 은사입니다. 사랑이 큰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니 봉사하는 은사가 있고, 가르침의 은사, 위로, 구제 등의 은사가 다양합니다.
다양한 은사를 주신 이유는 저마다 예수님의 몸의 지체로서 예수님의 몸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기능만이 몸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른 기능이 필요합니다. 가르침이 필요할 때가 있고, 위로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각각에 때에 맞게 그 은사들이 적절히 활용되면 예수님의 몸은 건강해지고 풍요로워집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에서의 상황은 그 은사들의 다양함이 몸을 풍요롭게 하는 방향이 아니라 서로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다양성 중에 하나됨을 원하십니다. 기독교 교단들만 해도 다양합니다. 보수적인 교단은 기도의 능력과 영혼 구원의 복음전파, 그리고 거룩한 영성을 강조합니다. 진보적인 교단은 이웃 사랑, 사회 참여, 현실 변혁의 하나님 나라를 강조합니다. 은사주의 교단은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능력들, 그리고 찬양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신앙의 모습도 때에 따라 다릅니다. 오직 은혜를 말함으로 영혼에 안정감을 주고 마음에 위로를 주는 부분이 있고 동시에 우리의 자유를 가지고 행동해야 얻는 복음의 현실성,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성이 중요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풍요로우시기 때문에, 그의 하시는 일의 계획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눈을 들어서 크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놀라우신 지를 인정하게 될 때 이 많은 다양성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쓰기를 원하시는 은사라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겸손한 마음은 그것을 인정하게 합니다.
 
바울은 16절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서로 겸손히 마음을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합니다. 18절에서는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명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는 길은 겸손함 뿐입니다. 나의 생각이 중심에 서지 않고, 나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으며, 상대방의 장점을 인정해주는 겸손함, 그리고 상대방과 하나되길 원하는 사랑이 이 다양성 속에서도 하나됨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를 사랑하고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하라고 말합니다. 먼저 사랑하고 먼저 존경해주는 것, 먼저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됨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는 공동체의 특징은 언제나 먼저 사랑해주고 먼저 용납해주는 영이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맥락에서 12장 1절을 읽어야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여기서 이 몸은 개개인의 몸만을 의미하지 않고 더 나아가 각각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다양한 지체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몸을 드려야 하는 이유는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다양한 은사들을 통해 부지런히 섬길 때에 이 몸이 “살아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공동체의 몸이 살아 있는 것, 생동하는 것, 건겅해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앞서 11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갈등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서로 판단하거나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고 말한 후에 12장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하는 권면이 등장합니다. 이는 그러므로 공동체의 신앙에 대한 권면으로 “너희 몸을 드리라”고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3절에서 “각 사람이 마땅히 생각할 이상의 생각을 하지 말라는 권면”은 여전히 서로를 스스로 품은 판단으로 바라보는 공동체에 대해, 판단하는 높은 마음이 아니라 용납하고 인정하고 사랑하는 낮은 마음을 품으라는 권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겸손하게 서로를 바라볼 때, 오히려 나는 지체로서 나의 일을 부지런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모든 일을 맡아서 하려는 것은 부지런한 것이 아니라 통제욕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정말로 인정한다면 나는 내가 맡은 일 안에서, 그 한계 안에서, 나에게 주신 은사에 집중해서 그것을 강화하는 훈련의 기회로 봉사하게 될 것입니다. 농구 팀에서 3점 슈터는 자기 팀의 누군가가 리바운드를 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마음껏 3점 슛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3점 슛을 늘 연마하며 부지런히 훈련할 것입니다. 
서로에게 주신 은사를 존중하고, 하나님이 서로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음을 믿을 때, 우리는 서로를 용납하고 부족함을 이해하는 동시에, 나에게 주신 은사를 부지런하게 불을 붙이고 강화하는 훈련으로 사용할 것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은사의 사용은 주를 섬기는 것이 목적입니다. 은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한 것이고, 주님의 몸을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은사는 쓸 수록 강화되고 쓰지 않을 수록 약화됩니다.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많이 해주어야 은사가 강화되고, 가르침을 위해 준비하고 또 현장에서 사랑으로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기 위해 사용할 수록 가르침의 은사가 강화됩니다. 위로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때에 맞는 말씀과 마음을 가지고 해야 위로의 사역에 능력이 나타나고 열매가 나타납니다. 이 모든 은사는 공동체의 지체들을 건강하게 하고 하나되게 하기 위해 쓰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것 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연약함과 허물을 가진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함께 생활하면서 우리는 좋은 것만 경험하지 않고, 때로 상대방에게서 약점과 허물들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17절에서 말합니다. 
누군가의 잘못과 허물을 만날 때에 그것에 상응하는 악한 것으로 되갚지 말아라. 네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고 해서, 너도 똑같이 아픔을 주는 방향으로 행동하지 말아라. 오히려 선으로 그것을 되갚고, 선으로 그것을 이기라.
각자에게 은사와 역할을 주셨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은사와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판단하고 심판하는 역할입니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은사는 마귀가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역할입니다. 심판이 아니라 판단과 정죄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 역할을 마귀가 자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판단하는 것은 각 사람에게 주신 역할과 믿음의 분량을 넘어가는 행위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아니다. 우리는 분별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최종적 판단은 주께 맡기고 분별한 것에 대해 기도하고 중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실 때까지 인내하는 영성이 필요합니다. 비판하는 마음에는 인내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이 참된 분별이 되고 하나님의 판단까지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을 인내하고, 용서하고, 기다릴 수 있는 겸손한 영성을 단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책망은 사람을 살랍니다. 시의적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판단은 사람을 살리지 않고 정죄하고 가둡니다. 사람은 심판의 때를 정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실 때까지 사람은 자기 한계 내에서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말씀하실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너는 악을 선으로 갚으라”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원수가 주리면 먹이라 목마르면 마시게 하라. 내가 심판은 알아서 할테니 너는 악에 대응하느라 악하게 되지 말고, 그 복잡한 일은 나에게 맡기라. 너는 선을 행함으로 악을 이기라”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화도록 하라” 이 세대를 본받는 것은 서로 너무 쉽게 비판하고 빠르게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인내가 없고 사랑이 없이 빠르게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은 우리가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나되는 것이며, 서로를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은사 중에 사랑은 최고의 은사입니다. 사랑은 누구나 구할 수 있고 구하는 자에게 넘치도록 주시는 은사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함으로 기다려줌으로 주가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는 주의 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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