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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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Horizont haben

jo_nghyuk 2022. 8. 30. 22:42

북해에 다녀왔다. 바다 앞에 서면 사람의 마음이 회복이 된다는 연구결과를 보고 난 후에 점점 바다를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북해의 분위기는 대체로 비슷하다.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의 북해처럼 독일의 북해도 망망하게 푸른 바다가 지닌 결연함 같은 분위기가 있다. 항구로 들어오는 덴마크 배를 보면서 두시간 거리에 있는 건너편 땅을 상상해본다. 해변은 땅이 끝나는 곳이지만 동시에 생명의 원천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바다에 발을 담그고 나의 작음과 창조주의 크심에 대해 묵상해보았다. 매순간 부지런하게 몰려오는 파도가 해변을 늘 새롭게 갈아엎는다. 모래는 매번 부드럽게 깔리는 융단 같아졌고, 나는 그 길 위를 하염없이 걷는다. 사람들도 모두 바다가 만든 부드러운 길 위로 걷고 있다.

어느순간부터 노트북 자판이 덜그럭거리기 시작했다. 문득 이 키보드처럼 내 마음도 들썩거리는 것을 보았다. 거친 시간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울컥울컥, 요동치곤 했다. 가끔씩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하기도 했다. 하이델베르크의 산에서 숨을 쉬고 싶었던 그때처럼, 나는 숨통이 트이고 싶어서 바다를 찾았다. 독일어로 Horizont haben이라는 표현이 있다. 시야가 넓다는 뜻이다. 지평을 가진다는 것은 무한한 것과 연결되는 것이고, 유한한 스스로의 개방이기 때문이다. 시야가 좁다는 것은 지평을 가지지 못해서, 무한함과 연결되지 못해서 눈 앞의 현상에 결착되기 쉬움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다를 보면 사람은 상상력을 통해 넘어갈 수 있음을 직감하는지도 모른다. 유한하지만, 무한한 생명의 보고와 연결되어서, 찰싹, 찰싹, 파도의 호흡처럼 리듬 있게 넘어갈 수 있다. 찬찬히 할 수 있다고, 다시 자연의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상력은 한계가 없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계의 빗장이 벗겨질 수 있음을 꿈꾸는 데에서 나온다. 

목사님께서 안식월로 한국에 가 계셨을 때, 나는 한달 간 새벽기도 설교를 준비하며 스스로 먼저 은혜의 가랑비를 맞고 있었는지 모른다. 새벽마다 작은 기도처에 걸어가 무릎을 꿇고 속에 있는 것을 토했다. 조용하게 전능자 앞에 머물기도 하고, 소리내어 찬양하기도 했다. 부르짖기도 하고, 쉬기도 했다. 기도가 끝나면 도서관에 갔고, 점심은 집에서 먹거나 공원 옆의 학생식당으로 갔다. 한달이 지나고 나는 베를린으로 여행을 갔는데, 내가 하는 것은 일상 못지 않게 반복적인 어떤 것임을 발견했다. 산책, 커피, 책. 나는 갤러리와 카페가 가득한 미테 지구를 걷고 또 걸었다. 다음날도 찾고, 오후에 또 찾았다. 바다에 가면 발을 담그듯이 베를린에 가면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신다. 기차 안에서는 딜타이를 읽었다. 

파리 학회에서 가진 돈을 탕진했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에는 그러지 않기 위해 남프랑스가 아닌 베를린을 택했지만, 여행을 다녀온 뒤로는 다시 냉장고를 파먹는 중이다. 체력도, 돈도 탕진했지만, 나의 영혼은 마침내 수리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북해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학을 오기 전, 아니 전도사가 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의 배경이 북해였기 때문이다. 나는 십년도 더 전에, 이미 북해 해변 위에서 햇빛을 받으며 웃고 있는 나와 아내와 아들을 보았다. 나는 유한하지만,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계획하셨다. 이번 여행에서도 로스톡에는 뇌우 경보가 있었지만, 우리는 북해로 향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바다를 꼭 보고 싶었다. 도착했을 때에는 구름이 가득했지만, 점점 해가 뜨고 있었다. 지평을 가지는 사람은 복이 있다. 나의 지평은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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