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10월 4일 설교, 고린도전서 13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10월 4일 설교, 고린도전서 13장

jo_nghyuk 2022. 10. 4. 03:01
10월 4일 새벽기도회
찬송: 503장 통 373
  •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말씀: 고린도전서 13장
  • 지식은 부분적으로, 사랑은 완전하게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모든 것의 시작이 되고, 구심점이 되며, 마침이 된다고 말합니다. 
1-3절은 “사랑이 없으면” 그 어떤 훌륭한 일, 선한 일을 하더라도 아무 유익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흠모해 마지않았던 천사의 언어인 방언의 은사도 사랑이 없이 하면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가 될 뿐이며,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은사인 예언과 지식도, 심지어 산을 옮기는 믿음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좋은 믿음도 사랑이 없는 믿음은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무엇이길래, 사랑 없이는 은사도 지식도 믿음도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믿는 복음의 정수가 하나님의 세상 사랑하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어떤 가치가 있어서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13절로 이루어진 고린도전서 13장에 8번이나 등장하는 사랑이란 단어는 원어로 모두 아가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우리들이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과 다른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온전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사랑은 상대방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그를 끌어안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 사랑은 결코 우리에게서 시작될 수가 없는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흘러오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아가페 사랑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배신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실 때, 네가 나를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자신이 하나님을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만, 아가페 사랑으로는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우리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가페 사랑을 주시고, 또, 우리에게서 아가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실까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저는 1-3절을 사랑이 없으면 이라는 구절을 “예수님이 없으면”이라고 바꾸어 읽기를 권면합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에, 예수님 안에 우리가 거할 때에 이 사랑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함께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 어떤 일도 시작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서 어떤 일을 시작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허망합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나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나에게도, 다른 이웃에게도 유익을 끼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예수님이라면, 사랑하는 길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순종하는 길이며, 행동하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이 연단되어지는 길입니다. 
사랑은 인격을 연단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4-6절 전반부까지 보십시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등등은 모두 인격과 관련된 것이며,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태도와 행동과 마음의 상태를 어떻게 연단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악한 일들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사랑 뿐만 아니라, 무엇을 하는 적극적인 사랑일 것입니다. 6절 후반부-7절에서는 사랑이 무엇을 한다고 말합니까?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사랑은 진리를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기를 즐거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진리의 길을 즐거워합니다. 그 진리를 향한 기쁨이 그 길을 걸어가며 모든 것을 참게 하고, 주님 말하신 모든 것을 믿게 하고, 주님 약속하신 것 중 하나도 빠짐 없이 소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 즉 다른 것들이 다 사라지고 없어지고 난 후에도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것은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것은 보이는 형제 자매를 참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분란과 불일치가 가득했습니다. 그 불화를 이기는 것은 예언도 아니고, 방언도 아니며, 지식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말처럼 우리가 예언을 하든 방언을 하든 지식을 쌓든 그것들은 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예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지 못합니다. 당시 시대의 거울은 금속으로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얼굴을 뚜렷하게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비유로 하여 우리가 그 어떤 은사를 받든 지식을 받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밝히 드러내 주지 못하며 부분적으로만 드러낸다고 표현합니다. 
무엇을 아는 것이, 또는 어떤 능력을 가지는 것이나,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해 가는 길이 아님을 바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가는 길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아는 가운데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할 때에 판단이 생기고 교만이 싹틉니다. 방언이나 예언의 은사는 고린도 교회를 튼튼히 하지 못했습니다. 신학적 지식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구제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그 모든 도구들을 “사랑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것은 늘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지 않는 것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오늘 요구하는 사랑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는, 성령께서 채워주시는 거룩한 아가페 사랑을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원하십니다. 이 사랑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주님께로 돌아갈 때에, 나의 믿음의 견고치 못함과 나의 소망의 인내하지 못함, 나의 사랑의 신실하지 못함을 회개할 때에, 연약한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사랑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다 알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욥을 정죄하던 욥의 친구들의 잘못은 자신들이 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욥에게 나아가야 했던 것이 아닐까요? 욥 또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다시 회복해야 했던 것 아닐까요? 오늘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것은 알지 못함이 아니라, 알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행하지 않는 사랑일지 모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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