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10월 5일 설교, 고린도전서 14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10월 5일 설교, 고린도전서 14장

jo_nghyuk 2022. 10. 5. 00:28
10월 5일 수 새벽기도회
찬송: 211 통 346
  •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말씀: 고린도전서 14장
  •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3장의 1-3절에서는 방언과 천사의 소리를 말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러한 언급을 한 이유가 이제 14장에서 드러납니다. 당시의 고린도 교회에서는 교회 가운데에서 방언으로 기도할 뿐 아니라 전체의 모임에서도 방언으로 계속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어제 13장에서 했던 표현과 비슷한 표현을 다시 쓰는데, 14장 7절을 보면, 피리나 거문고가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 소리가 피리인지 거문고인지 어떻게 알겠느냐고 반문합니다. 8절에서는 전쟁 나팔 비유를 듭니다. 나팔이 분명한 소리를 내야 하는데 그 소리를 내지 않으면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전투를 준비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 어떤 소리도 뜻 없는 소리, 의미를 가지지 않은 소리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말은 고린도 교인들이 전체의 모임에서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계속 말하는 현상을 꼬집는 것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계속 말한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외국인처럼 되어 서로를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권면을 내립니다. 그것은 예언의 은사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방언은 사람이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예언은 반면에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3절에 등장하는 예언의 특성을 보십시오.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미래의 일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형제 자매를 향해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을 품고 계시며 어떤 말씀을 하기를 원하시는 지를 대언해주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을 말하면 자기의 덕을 세우지만 예언을 하면 교회의 전체의 덕을 세운다고 4절에서 말합니다. 
방언은 물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그 뜻을 자기도 모르고 이웃도 모릅니다. 나도 그 말에 대해 외국인이고, 이웃도 그 말에 대해 외국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의 은사를 구하라고 13절에서 권면합니다. 방언을 통역을 해주면,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언어로 번역하면 예언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기도할 때에 방언으로도 기도하고 자신이 이해하는 언어로도 기도한다고 고백합니다. 나의 이성이 알지 못하는 영의 깊은 간구를 위해서는 방언으로 기도합니다. 그런데 나의 마음을 위해,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이성적인 정신을 위해서 나는 내가 아는 말로도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처음 이것을 읽을 때, 방언기도와 우리말 기도를 반반씩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이 고백이 뜻하는 바는,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구하게 될 때에, 그것은 이웃에게도 유익이고 나에게도 유익을 주는데, 그 이유가 방언으로도 기도하고, 그 뒤에 그 방언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서 자기 나라의 말로도 기도할 수 있게 되어서 영도 유익을 누리고 정신도 유익을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방언으로도 기도하고, 나의 생각과 마음에 있는 것도 기도하는 것이 맞습니다. 나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무시하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으로 기도하고, 나의 마음에 있는 것을 알아듣는 말로 기도하다보면, 상호침투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방언을 통역해서 기도하기도 하고, 내가 하나님께 마음에 있는 것을 아뢰고 울부짖은 후에 방언기도를 통해 내 영이 더 깊은 간구,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간구로 그것을 탈바꿈해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자신의 마음의 간구도 기도하지만,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힘써 기도하듯이, 영으로도 기도하고 마음으로도 기도하는 것은 따로 따로가 아니라 내 안의 영과 내 마음이 점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온전한 하나를 이루어가는 과정 가운데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방언을 통역하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은 그럼에도, 나 자신을 위해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희생적 사랑, 나보다 이웃을 섬기는 사랑을 고린도서에서 읽어왔습니다. 이 통역의 은사, 예언의 은사를 구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다른 지체들을 위해서 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극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방언을 일만마디 길게 하는 것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다섯 마디를 짧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왜냐하면 일만마디의 방언에 이웃 사랑이 없고 자기애만 있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장성해지십시오.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입니다. 교회의 지체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며, 사랑으로 나의 지식이 깊어져가는 것, 사랑으로 나의 은사가 강화되는 것이 바로 지혜에 장성해지는 것입니다. 라고 바울은 20절에서 말합니다. 
 
바울은 은사를 금하지 않습니다. 저같으면 교회가 시끄러우면 방언을 금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바로 그 방언의 은사가 발전해야 하며, 자라나야 하고, 성숙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성숙하게 되는 길은 지식을 쌓거나, 능력을 더하거나, 자기 계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이 주는 자기중심적 메시지일 뿐입니다. 성경의 관점은 각 지체가 서로서로 연합하여 성숙하여지는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내가 성숙하게 되는 길은 서로서로 연합하는 길 뿐입니다. 이웃을 섬기는 길이 내가 자라나는 길입니다. 바울은 사랑을 통해 여전히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의 은사를 더 강화하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을 더 성숙하게 자라나게 하십시오. 그러나 그 길은 사랑하는 길입니다. 또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길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이 지으신 것 중 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질서를 가장 잘 찬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뒤로 가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장성해져야 합니다. 미성숙한 사람은 성숙해져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 없음으로 뒤로 물러나는 것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다시 일어나 연약한 무릎과 피곤한 손을 일으켜 세워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함께 전진하지 않는다면, 일만 마디 방언을 하고, 많은 은사를 누려도, 많은 구제를 하여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방언은 통역되어져서 이웃의 귀에 들어가 이해되어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사는 사용되어져서 이웃의 손과 발을 돕는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구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부요하심이 이웃에게 흘러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진하는 방향은 늘 이웃과 함께이며, 이웃을 세우는 방향에 있습니다. 바울은 덕을 세우라고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 덕을 세우라는 말은 원어로 견고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덕스럽게 되라는 말이 아니라, 주의 몸된 교회를 세워주는 자가, 든든하게, 견고하게 해주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 자신을 세우고, 자기 자신을 채우려 하는 이 때에, 주의 자녀인 우리들은 서로 사랑함으로, 서로를 세우고, 서로를 채워주며, 서로를 굳건하게 하는 자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