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11월 11일 새벽설교, 고린도전서 2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11월 11일 새벽설교, 고린도전서 2장

jo_nghyuk 2023. 1. 9. 18:23
11월 11일 금 새벽기도회
찬송: 350 통 393
  • 우리들이 싸울 것은
말씀: 고린도전서 2장
  •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고린도 교회에 이 고린도후서라는 편지를 쓰기 전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편지를 먼저 보내었습니다. 
범죄한 자를 향한 징계를 말하는 고린도전서의 어조는 매우 강렬하고 엄중했습니다. "내가 그 교회에 가기 전에 그 교회에서 범죄한 자를 먼저 징계하라. 나는 이미 그 죄를 행한 자를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하였다"
그 편지를 받은 후에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명령을 따라 교회에서 범죄한 자들을 징계하였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당파를 짓는 것과 간음과 음란함이 주된 죄악이었습니다. 그 죄 모두 교회를 아프게 하고 갈라지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징계하는 과정에서도 교회는 아픔과 근심을  겪어야 했습니다. 바울의 첫 번째 편지는 단호함의 편지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근심하게 하는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로 인해 고린도 교회는 회개하는 애통하는 심령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에서, 다시는 근심으로 나아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미 근심하고 있는 자들에게 바울은 더이상 근심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근심하지 않고, 죄를 애통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근심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하지만, 근심이 시작된 자들에게 바울은 부드러운 위로의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바울은 2절에서 말합니다. 여러분이 근심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근심이 아니라 기쁨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눈물로 편지를 씁니다. 근심하게 하는 편지도, 눈물을 흘리며 쓰는 편지도 사실 모두 사랑에서 나온 편지입니다.
 
4절에서 말하기를 바울이 교회를 향한 큰 눌림과 걱정이 있으며,  바울의 눈물은 그들을 향한 넘치는 사랑 때문이라 합니다. 바울의 본심은 심판이 아니라 징계를 통해, 근심을 통해 회개하는 것이었으며,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적당한 근심을 원했으며, 지나친 근심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울은 죄를 죄가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함에 대해 먼저 말하는 이유는 죄에 대한 각성이 분명히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회개도 없으며, 용서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벌 이야기가 먼저 나와야 합니다. 왜일까요? 죄는 단순히 나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웃을 더럽히고 어지럽히고 혼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벌을 주시는 이유는 힘이 없는 이웃들을 힘이 센 이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무엇이 잘못인지 명확히 선을 그어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에서 돌이킬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의 많은 율법들이 그러했듯이 강하고 악한 자들로부터 약한 자들을 보호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범죄했던 사람이 근심에 빠져 있을 때 바울은 공동체가 그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7절.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 그가 너무 지나친 근심과 슬픔에 잠기지 않게 하라."
바울이 강경하게 앞선 편지에서 징계와 심판을 이야기한 이유는 그가 근심을 통해 회개 가운데 나아오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목적이 그 사람을 심판하는 그 자체에 있지 않고, 근심의 회개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앞서 편지를 써서 강경하게 그 사람을 심판하라고 한 이유는 그 사람을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이 근심을 통해 회개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의 죄에 대한 강경함과 고린도후서의 회개하는 자에 대한 부드러움은 언제나 함께 읽혀져야 합니다. 우리는 회개하는 자에게 강경하면 안됩니다. 죄짓는 자에게 부드러워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한 분별력을 줍니다. 
그런데 바울의 의도와 달리, 그 사람 뿐 아니라, 그 사람을 징계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에 근심과 아픔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심판의 과정, 징계의 과정은 기쁜 것이 아닙니다. 심판과 징계를 하고 나서도 근심이 있고 아픔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정죄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통해서 성취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어떤 범죄한 이들을 심판하시고 징계하시지만 그 이유는 심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회개와 회복에 있습니다. 그리고 범죄한 사람의 회개와 회복은 공동체의 회복과도 관련을 가집니다. 바울은 8절에서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고 말합니다. 교회에 범죄한 자들, 그리스도의 몸을 아프게 한 자들을, 그들이 회개할 때에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는 범죄한 자만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하는 자들을 또한 회복시킵니다. 용서함으로써 나도 회복이 됩니다. 
바울은 더 나아가 용서를 하는 이유가 사탄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정죄해야 할 때에 정죄하지 못하는 것도 사탄에게 매인 것이나, 용서해야 할 때에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사탄에게 속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주님의 뜻 가운데에서 행해야 합니다. 
 
바울은 14절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에 대해 말합니다. 
14절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승리한 국가가 개선행진을 하며 향을 피웠습니다. 그 향기는 승리자의 향기였고 도시 구석구석에 퍼져 모든 사람이 맡았습니다. 같은 냄새이지만 전쟁에 이긴 이들에게는 기쁨의 향이었고 전쟁에 패배한 적들에게는 패망의 냄새였습니다. 
17절을 읽어보면,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거리를 둘 것을 늘 명령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가져야 하는 분별력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하며 근심하는 이들에게는 용서와 위로를, 여전히 죄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주님의 진리를 전하는 데에 있어서, 그 진리를 살아내는 데에 있어서 담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냄새, 승리자의 냄새는 도시 곳곳에 퍼집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소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공공연하게 선포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진리 앞에 담대해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때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근심에 싸인 자를 위로하고, 혼잡한 자들 앞에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주의 진리를 말해야 하고,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승리자의 냄새를 풍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기신 분의 자녀입니다. 담대해야 하고, 영적 싸움을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승리하신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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