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12월 28일 새벽설교, 고린도후서 4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12월 28일 새벽설교, 고린도후서 4장

jo_nghyuk 2023. 1. 9. 18:25
12월 28일 수 새벽기도회
찬송: 324 통 360
  • 예수 나를 오라 하네
말씀: 고린도후서 4장
  • Give me Jesus
 
사실 복음을 복음되게 받는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따라가는 것은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복음이 아니라 이 세상을 따라가는 것은 너무 쉽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는 것은 나의 마음을 채워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본받는 것은 나의 마음을 채우는 길이 아니라 답답해지고,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광야와 같은 길을 걷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좁은 길로 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않는 것은 수동적으로 나를 지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중립지대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계속 따라가는 길만이, 계속해서 주의 형상으로 어제도 오늘도 변화되어져 가는 길만이 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복음을 복음되게 받는 길입니다. 
복음은 빛이기 때문에 복음은 우리 안의 어둠을 드러냅니다. 이 사역을 하는 바울은 그래서 환난을 당했고, 예수님도 미움을 받았습니다. 바울 자신도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만났습니다. 그 큰 빛을 만난 바울은 동시에 눈이 머는 경험을 합니다. 복음은 바울을 고꾸라뜨리고 먼지같은 존재로 만들고 불구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바울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7절에서 10절을 읽어보면, 바울이 자신이 전한 복음 때문에 당한 환난의 내용들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항상 답답한 일을 당하였고,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였으며 예수의 죽음을 매일 몸에 짊어지고 산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관심사는 그러한 어려움들, 답답함들을 벗어던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러한 것들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고, 오히려 그러한 연약한 경험 가운데, 자신의 질그릇 같은 육체를 통해 역사하시는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완전히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자신의 육체가 어찌 되든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여전히 답답하고 우겨쌈을 당하고 해도 사람들이 복음을 믿을 수만 있다면, 예수께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 답답한 골짜기를 매일 걸어갔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삶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또 매를 맞고, 또 돌을 맞고, 또 굶고, 또 추위에 시달리고, 또 자지 못하였으나 바울은 자신의 몸에 사망이 역사할 수록, 사람들에게 생명이 역사하는 것을 보았고, 이제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망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생명은 여러분 가운데 역사합니다. 
이 바울의 고백 앞에서 우리는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아니, 둘 다 생명을 누리면 안됩니까? 왜 바울은 사망을 경험하고, 매일 답답하고, 매일 아파해야 하고, 고린도교인들은 생명을 누리고 자유를 누리고 기뻐해야 합니까? 아니 차라리, 최소한 둘 다 같이 사망을 경험하고 생명을 누리면 안되는 것입니까? 왜 고린도 성도들에게 너희도 나처럼 살라, 나처럼 고난을 겪으라 말하지 않고, 너는 살아라, 나는 죽는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주님이시고, 너희는 존귀한 주의 자녀이고 나는 너희들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 말에서 이미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의 자녀들과 같으며, 어린 아이들과 같은 신앙인이고, 바울은 그들의 아버지와 같으며,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신앙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자녀들은 자신들이 잘 되는 것을 기뻐하지만, 부모는 자신이 잘 되지 못하여도 자녀들이 잘 되는 것을 보면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나는 낮아지고 상대방을 존귀하게 하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바울은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영광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8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주목한다는 것은 집중해서 본다는 것입니다. 신경써서 그쪽만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 바울이 보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 눈에는 보이지 않고, 바울에게만 보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사로잡힌 자는 예수님만 보입니다. 마치 스데반이 자신을 돌로 치려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죽는 순간에도 주목하듯이 바울은 예수님만 바라봅니다.
바울이 주목하는 것은 자신의 면류관이 아닙니다. 그 면류관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 면류관을 향해 가는 길은 가시 면류관의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영광의 무게에 비하면 지금 겪는 환난이 아주 경한 것이라 고백했지만, 중요한 것은 이 가시 면류관의 길이 매일 걸어야 하는 비아 돌로로사였다는 것입니다. 매일 바울은 답답하고 아픈 삶을 살았습니다. 아직 손에 잡히지 않은 면류관을 얻기 위해 그는 매일같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영들이 우리 마음을 미혹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한다는 4절의 말씀이 이제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세상 영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세상의 그 어느 빛보다 강하고 뚜렷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이 세상 영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해 이렇게 뚜렷한 빛으로 집중되는 것을 분산시키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 마음을 빼앗아 가고자 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해 가는 순례길은 이 분산시키는 것들과의 영원한 싸움입니다. 마치 욥의 시험과도 같이, 돈의 문제를 넘어서면, 건강의 문제로 괴롭히고, 건강의 문제를 넘어서면 가족의 문제로 괴롭히고, 가족의 문제를 넘어서면 관계의 문제로 괴롭히는 집요한 마귀의 시험처럼, 순례길은 크고 작은 시험을 계속해서 이기며 통과하는 길입니다. 시원한 길이 아니라 답답한 길이고, 아픈 길이며, 상처 받는 길입니다. 
그러나 4:16의 확신에 찬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바울의 영혼의 불꽃은 육신의 어려움이나 아픔 때문에 사그라들지 않고 오히려 더 크게 불타오릅니다. 겉사람이 낡아진다는 것은 육신으로는 환난을 당하고 당해서 닳고 닳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환난을 통과하면서 바울의 속사람, 바울의 영은 지극히 강건하여지며 주님의 광채를 반사하며 매일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이찬수 목사님이 제가 안 존경하는 니체의 말을 인용해서 설교하신 적이 있어서 저도 인용합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이것이 영적 현실입니다. 악한 영에게 잡혀먹히든지,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낙심되는 현실 속에서 현실 너머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바라봅시다. 마귀는 우리를 죽이지 못합니다. 아프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성령 안에서 우리를 연단시키고, 연단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소망을 낳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여 그 아픔을 통해 더 강해집니다. 아픔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질그릇이라는 것을 철저히 체감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엄청나게 크신 분임을 함께 경험합니다. 
우리는 그 아픔을 겪으면서 낙심하지 말고,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나에게 예수님을 주세요. 나에게 있는 것은 다 가져가십시오. 그러나 그 대신 나에게 예수님을 주십시오.
내가 원하는 것은 예수님 뿐입니다. 다 가져가세요. 그러나 그 대신 나에게 예수님을 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만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다 잃어도 예수님을 얻으면 승리한 삶입니다. 
세상아 오너라, 환난아 오너라, 사망아 나는 두렵지 않다. 나에게서 다른 것을 다 빼앗아 갈지는 몰라도 예수님은 빼앗을 수 없다. 승리의 함성을 외치는 군사들 앞에 마귀는 철저히 힘을 잃고 도망칠 것입니다. 예수님을 얻는 순간, 우리는 바울이 본 그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백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종이 되어 기꺼이 여러분을 섬길 것입니다. 칭찬이나 인정이나 사례는 필요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주인이십니다. 나는 예수님이 좋습니다. 나는 예수님에게 더 사로잡히고 싶어서 푯대를 향해 달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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