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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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12월 18일 주일설교, 빌립보서 3:7-21

jo_nghyuk 2023. 1. 9. 18:27

빌립보서 3:7-21

<우리를 살리는 것은 늘 우리 앞에 있습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1

아주 오래전에는 누가 누구에게 소식을 전하려고 하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전령을 불러서 그를 통해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사람을 메신저라고 하고, 소식의 전령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인물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소식을 발신하는 자와 비슷한 권위를 갖습니다. 그리고 소식을 전하는 사람 자신도 소식을 전하는 자의 생각에 동의하면서 소식을 전하지요.

그런데 현대에 들어서는 소식을 전하는 자와 소식 자체가 분리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우체부는 편지와 아무런 관련을 맺지 않습니다. 메신저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많은 메시지들의 홍수 속에서 새로운 문화 현상이 발생합니다. 편지를 받거나, 메시지를 받아도, 답변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메시지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에 일일이 답변을 하지 못하고, 때로는 중요한 메시지를 받아도 그것을 모르고 놓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여러분 모두는 유튜브를 사용할 것이고 여러 채널들을 구독 중이실 것입니다. 구독 중인 채널에서 알림이 오는데, 알림이 너무 많으면 정작 원하는 채널의 영상을 보지 못하기도 하지요.

 

2

빌립보서를 읽어보면 바울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메시지만 듣기 위해 다른 메시지들을 차단합니다. 마치 유튜브의 다른 채널들의 알림을 끄고, 채널의 알림만 키고 기다리듯이, 아니 정확히는, 다른 채널의 구독을 중단하고 하나의 채널만을 구독하듯이 바울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대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명확히 듣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들의 알림은 메시지를 흐리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전에는 나에게 유익하던 것이고 나를 즐겁게 해주고 높여주는 것들이었는데, 이제는 해가 된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여전히 그것을 아까워하는데 포기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메세지가 가장 중요한데 그걸 못듣게 하기 때문에, 방해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8절에서 바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는 이유와 목적이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그리고 9절이 말하듯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얻다와 찾아지다는 같은 동사의 능동태와 수동태입니다. 얻다라는 헬라어는 파악하다, 이해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부터 발견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소는 다름 아닌 십자가의 고난의 장소이며, 나의 죽음의 장소라는 점을 빌립보서 전체를 통틀어 바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철저히 나와 그리스도만 있어야 하는 공간에서, 다른 모든 것들, 세상의 인정, 기쁨, 나의 유익 등등은 그리스도와 내가 서로를 아는 은밀한 교제를 방해할 뿐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울을 향한 세간의 평판은 매우 좋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신분도 좋은데 종교심도 투철하고 도덕성도 훌륭하다. 게다가 지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인정은 바울의 발목을 잡을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을 때에, 우리의 지위가 올라갈 때에, 내가 사회 속에서 자기효능감을 누리고 있을 때에 우리는 특별히 경계해야 합니다. 인정을 받고, 지위가 올라가고, 유익이 많아지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데에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상관이 없을 아니라, 사람에게 인정받으면 받을 수록 나는 그리스도와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멀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은 인정을 받거나, 높아지거나, 되거나, 승승장구하는 길이 아닙니다. 보통은 반대 , 어려운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승승장구의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정을 받을 수록, 소위 수록, 나갈 수록 무서워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멀어지기 아주 좋은 상태에 처했구나!

 

3

바울은 좋은 길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의 길을 택합니다. 10절을 보면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본받는다는 의미는 따라하는 것입니다. 본받는 것은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마치 메시지를 전하는 전령이 메시지와 일체가 되듯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체가 되고,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과 일체가 되듯이, 예수님을 본받는 것은 예수님과 일체가 되어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길은 고난의, 십자가의 길입니다.

바울이 걸어가는 길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높아지는 길이 아니라 끊임없이 낮아지고 빈궁해지는, 자아가 죽는, 초라한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세상의 부요함으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바울은 지금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전히 자신의 부요함을 고백합니다. 그의 부요함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표면적으로 보기에 가난하고 약하고 갇혀 있어도 예수와 가장 가까이 있을수록 가장 부요한 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전히 자신이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여전히 길은 달려가야 하는 길입니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독일에서는  소식을 전하는 우편배달부를 Kurier라고 부릅니다. Kurier 어원은 라틴어 currere 있습니다. 뜻은 달려가다 입니다.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달려가야 합니다. 소식을 기다리는 곳이 있고, 다급하기 때문입니다. 

 

4

신앙인은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 세우지 않습니다. 바울은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푯대가 여전히 자기 앞에 있다고 합니다. 푯대는 내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세우는 것입니다. 푯대는 나의 고유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18 내가 여러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를 버리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나의 유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은 나의 유익을 버리기에 불편해지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말하십니다. 너의 신이 너의 배가 되지 않게 하라. 너가 따라가는 것들이 땅의 일들이 되지 않게 하라. 너는 땅이 아니라 나에게 속한 자이다. 내가 가라 하는 데로 가라. 

바울은 디모데후서 4:9-10에서 디모데에게 편지합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느니라 

말은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메시지와도 같습니다. 

너는 달려오라. 나에게 지체하지 말고 달려오라. 너도 다른 이들처럼 나를 버리고 세상으로 가려느냐? 나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추구하려느냐? 그리고 메시지는 읽음 표시가 되어 있음에도, 아직 우리로부터 답장이 나가지 않은 메시지입니다.

 

5

바울이 앞에 놓인 푯대를 향해 달릴 푯대는 하나님이 우리 삶에 세워주신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율법의 명령이나 종교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푯대는나의 하나님이 나에게만 주신 메시지입니다. 메시지를 하나님은 이미 보내셨고, 우리는 그에 대한 답장을 보내야 합니다. 

바울은 십자가 , 자신이 죽는 길을 통해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고백합니다. 원어를 보면, 부활은 죽은 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얻기 위해서는 죽기까지 가신 예수님과 사망의 현장에도, 십자가의 현장에도 같이 따라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정말 일체가 되려면,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도 따라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는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고 고백합니다. 십자가는 나의 선택과 거리가 길입니다. 십자가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너를 안다고 말하는 장소는 내가 십자가를 지는 장소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안다고, 얻었다고 말하는 장소는 십자가를 지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의 환경들, 사람들을 통해서, 설교와 묵상을 통해서, 찬양을 통해서, 꿈을 통해서, 심지어 찬장에서 갑자기 떨어진 유리컵을 통해서까지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시고 방향을 제시해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가 순종해야 하는 바로 하나를 넘어가지 못하고 있을 때에, 그것을 넘어갈 있도록 거듭해서 말씀해주시고, 함께 해주시겠다 약속하시고,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 건드시고, 우리의 삶을 흔드십니다. 하나님의 고집은 내가 거룩한 유익을 얻고, 내가 성장하고, 영적으로 되기 위한 고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되기를, 진정으로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내가 여전히 순종하지 않는 그것 하나에 대해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오늘 지키면, 내일 말씀하시고, 다음 주에 말씀하시고, 내년에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오늘 순종하면, 나는 오늘 새로운 삶을 누리고, 새로운 영적 축복을 향해 나아갑니다. 순종은 하루 아침, 순간의 결단만이 아닙니다. 순종은 매일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의 반복입니다. 그것이 쌓이고 쌓이는 기쁨이 강해지면, 사람은 이제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6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달려가라고 설교하지 않겠습니다. 자와 경주하기 전에, 보행자를 먼저 이길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달려가기 전에, 앞에 여전히 푯대가 있음을 알고 걸음을 떼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쌓여서 달려가는 것이지 달려가겠다는 한순간의 고백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발걸음들이 쌓여서 걸음이 되고, 걸음들이 가득해져서 달려감이 있습니다. 주가 말씀하시는 순종은 일상 속의 구체적이고 작은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달려가기 전에 순종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던 그것에 순종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세상 것을 배설물로 여기지 말라고 설교하지 않겠습니다. 세상 것을 억지로 배설물로 여기려 수록 오히려 배설물에 파묻히는 자신을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소망이 전혀 없음을 깨닫는 것이 차라리 빠른 길이며,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그것들이 배설물이 것입니다. 어떤 것을 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내가 정말 십자가를 지는 데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가기를 원하는가를 먼저 질문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친해질수록, 세상의 지나가 없어지는 것의 실체가 보이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노력 이전에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고, 얼마나 사랑하시며, 얼마나 나를 기대하시는지를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참된 의지는 자유에서 나오고, 참된 순종은 자발적인데에서 나오는 신비가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분은 여전히 앞에서 나를 부르십니다.

내가 나를 포기해도, 내가 나에 대한 기대가 없어도, 분은 나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 자신에 대한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는 오늘도 힘차게 우리 앞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가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던 순종을 오늘도 말하십니다. 나조차도 연약하여 포기한 그것을 하나님은 다시 해보라고 도전하십니다. 

십자가는 거창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앞에 주가 오늘 세우신 푯대입니다. 다른 사람 아니고, 나에게, 나의 하나님이 직접 요구하시는 순종의 푯대입니다. 다만 푯대를 향하려면, 우리는 항복해야 발을 있습니다. 의지로 푯대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항복하여 주의 부르심에 이끌려야 합니다. 그때 성령의 바람을 타고 우리는 비로소 달려갈 있게 됩니다. 성령의 바람을 타는 것은 거리낌이 없어야 가능하지 내가 내달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살리는 것은 그래서 우리 앞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여전히 나에게 실망하지 않고, 실망스러운 나를 주의 십자가에 함께 매달고, 주가 기대하시는 나를 푯대로서 앞에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푯대가 옆이 아니라, 앞에 있다는 것은 주께서 나를 기대하시고, 인정하신다는 증거이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고백합니다. 여전히 달려가야 분량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이루지 못한 푯대가 앞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지지 않은 십자가 길이 아직 남아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다리는 자는 달려갑니다. 

빨리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싶은 사람, 예수님을 내가 알고, 예수님이 나를 아는 사랑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서두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살리는 것은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바라건대 주께서 삶에 말하시는 구체적인 푯대, 구체적인 순종의 십자가를 우리 모두 기꺼이 지고, 내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나를 아는 , 내가 예수님을 얻고 예수님이 나를 얻는 삶에 들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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