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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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1월 22일 튀빙엔 주일 설교, 십자가 흔적의 회복

jo_nghyuk 2023. 1. 23. 05:13

빌립보서 3:7-21

1
저는 미술관을 가는 것을 참 좋아해서 어떤 도시에 가면 미술관을 주로 방문하는 편입니다. 몇 주 전에 지인 목사가 있는 드레스덴을 방문하게 되면서 그곳에서도 미술관을 잠깐 가게 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미술관에서 아주 특별한 그림 하나를 2주간만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다음과 같이 생겼습니다.


이 그림의 이름은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의 <열린 창가에서 편지를 읽는 소녀ein brieflesendes Mädchen am offenen Fenster>입니다. 여러분은 이 여인이 어떤 편지를 읽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이 편지는 밝은 내용의 편지일까요, 어두운 내용의 편지일까요? 그림에는 별다른 단서가 없고 우리는 추측할 뿐입니다.
베르메르가 이 그림을 그린 후 이 그림은 네덜란드 델프트를 떠나 독일 드레스덴에 줄곧 소장되어 있었는데, 드레스덴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존하고 검사하는 작업을 하던 중에 사람들이 이 소녀 뒤의 벽에서 이상한 흔적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 얼굴 같은 모양이 벽에 있는 겁니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소녀 뒤에 위치한 벽 안에 큐피트가 숨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독일 사람들 답게 오랜 시간의 연구와 토론을 거치고 거쳐서 얻게 된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녀 뒤에 덧칠된 물감의 성분이 베르메르 시대의 것이 아니라 후대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화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 그림을 구입한 뒤에 큐피트를 덧칠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소녀 뒤에 아무 것도 배치되지 않았을 때에는 매우 불명확했던 구도나 소실점 등이, 뒤의 큐피트 그림을 회복시키고 나니 완벽히 균형을 되찾았다는 점입니다. 이제 두 번째 그림을 보시겠습니다.


그림의 분위기가 매우 다르지 않습니까? 여러분께 이제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소녀가 읽는 편지는 밝은 내용일까요, 어두운 내용일까요?
이전에는 그 편지가 무슨 내용일지 방의 분위기를 통해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방이 매우 어두운 예전 그림의 분위기상 어두운 편지일 수도 있다고 짐작하기 쉬웠습니다. 남편이 돌아갔음을 알리는 편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뒤의 큐피트가 복원된 그림을 보면 소녀가 읽는 편지는 어두운 내용의 편지가 아니라, 기쁨과 설렘을 주는 연애 편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2
열왕기하 22장을 보면 요시야가 왕이 된지 열여덟째 해에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성전을 수리했다는 것은 그 성전이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 성전에서 더이상 등잔대의 불을 타오르지 않았고, 성전은 어두침침하고 먼지가 자욱했을 것입니다. 목재들과 다듬은 돌들을 사서 성전을 수리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성전의 여러 군데가 무너지고 상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수리하던 도중에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이 담긴 율법책을 읽어보니, 요시야 왕이 자기 조상들부터 지금까지 악행을 저지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회개의 거룩한 역사가 시작되면서 종교 개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성전이 하나님의 율법책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뜻을 회복하면서, 더이상 어두침침하고 무너진 곳이 아니라, 끊임없이 등잔대의 등불이 타오르는 밝고 기쁜 곳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열왕기하 22장에서 무너져 있던 여호와의 성전은 무너지고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반영합니다. 잃어버린 여호와의 율법책은 여전히 성전 안에 있었습니다. 율법책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펴보지 않고 사용하지 않아서 성전 구석 어디엔가 방치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갈망이 없었음에 대한 상징입니다. 성전의 등잔불은 타오르지 않았고, 하나님의 율법책은 상실되었습니다. 아기천사가 상실된 베르메르의 그림 속 소녀처럼 주제를 상실하고, 자신이 읽는 편지의 내용을 망각하였습니다.
그림을 아무리 잘 그려놓아도, 주제가 되는 어떤 것을 상실하게 되면, 그림은 방향성을 상실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소녀의 등 뒤의 아기천사의 흔적처럼, 이스라엘 성전에서 발견된 여호와의 말씀의 흔적처럼, 여전히 우리 삶의 주변에는 회복으로 갈 수 있는 길이 흔적처럼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3
오늘 본문인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이 한 가지를 잃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것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잃는 것을 감수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을 얻는 데에 방해가 된다면 나에게 유익하던 것들도 다 배설물과 같다. 바울이 얻고자 하는 이 하나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인 만남을 의미합니다.
8-9절: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여기에서 얻다.와 발견되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같은 동사의 능동태와 수동태입니다. 말하자면 나도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도 나를 얻는 것이며, 나도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도 나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도 예수님을 잘 알고, 예수님도 나를 잘 아는 그 인격적 친밀함 가운데에 들어가길 바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잘 알고, 예수님도 나를 잘 아는 그 장소는 십자가 뿐입니다. 나와 예수님이 서로를 잘 아는 장소는 편안한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시고, 내가 예수님을 위해 자아를 못박아야 하는 불편한 장소라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능력과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기 위해 “죽으심을 본받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를 알려면 그리스도가 계셨던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그 장소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남기신 흔적의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 흔적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 바울은 11절에서 말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 이 말은 원어적으로, 내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그 부활”을 얻으려 한다는 말입니다. 부활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에서 주어지는 것이고, 죽어야 주어집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은 불편한 삶입니다. 복음을 사는 삶은 내 자아에 위험한 삶입니다. 그래서 내 자아가 살아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내 삶에 남기시는 흔적들이 나의 삶을 방해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가야하는데, 흔적들은 다른 방향과, 다른 의미에 대해 말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반대로 말합니다. 내가 그 예수의 흔적만을 좇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이 방해가 된다면, 그것들은 다 배설물일 뿐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가 나를 얻는 것만이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이유이다. 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8절에서 바울이 말하듯 그에게 가장 귀한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르메르의 그림 속 소녀에게는 그 편지를 보낸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중요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한 요시야에게는 하나님의 본의가 가장 중요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님이 자기를 아는 그것이 가장 중요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아마도 그 한 가지를 얻기 위해 다른 것을 모두 감수할 마음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4
바울은 여전히 이것을 얻기 위해 분투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자기를 아는 이 관계에 완전히 들어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향해, 그것을 이루고 싶어서 달려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제 바울 앞에 하나님이 세우신 푯대에 대한 고백이 등장합니다. 푯대라는 말은 목표점을 의미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더 이상 삶의 힌트처럼 주어지는 흔적만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명확한 목표이며, 내가 그를 향해 내달려야 하는 결승점입니다. 십자가는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늘 내 앞에 있는 것이 십자가이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방향으로 순종하며 인생 전반에 걸쳐 달려가는 그 과정 전체가 십자가의 길입니다. 바울 자신도 아직 온전히 이룬 것이 아니며, 늘 순종하여 달려갈 뿐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반면 18절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다고 바울이 애통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달려가야 할 명확한 푯대가 아니라 흔적 정도로 내버려 둡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말씀하시고 흔적을 남기셔도, 그것을 모른 척 하며 삽니다. 그림에서 소녀의 등 뒤로 아기 천사가 발견되어도, 그것을 지나쳐 버리듯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되어도, 그것을 모르는 척 지나쳐 버리듯이, 사람들은 십자가의 흔적에 무심하게 살아갑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나쳐 사는 그 이유를 19절에서 말해줍니다. 자신의 욕망이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것보다, 이 땅의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야 하늘의 것을 누리고,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데, 사람들은 예수님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배가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그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20절에서 우리의 시민권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고, 우리는 이 땅에서 잘 되는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임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기대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 확실한 증거가 바로 우리 삶에 개입하시고, 십자가의 흔적을 끊임없이 남기시고, 내 앞에 푯대를 세우시는 주님의 인애하심에 있습니다. 푯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별로 기대를 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푯대를 우리 앞에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그정도만 하고 살아라. 하고 내버려두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더 먼 곳, 더 깊은 곳까지 나아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그 광야 길로 들어가신 하나님,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고, 내 삶의 푯대를 적당한 정도가 아니라, 여전히 달려나가야 하는 저 앞에 두시고, 나의 한계 너머로, 나의 경험의 지평 너머로 나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우리는 항복해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의지로 하는 선택은 강하지 않고, 더 멀리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복하면, 우리는 그때부터 나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나아가게 되고, 성령의 바람을 타고 달려가게 됩니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지 않는 이유는 무거워서가 아니라,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대로 방향을 정할 수 없고, 내 마음대로 속도를 정할 수 없고, 내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없는 불편함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푯대로 세워주시는 십자가의 흔적들을 지나쳐서 살아갑니다.

5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에 십자가는 흔적으로만 남아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삶의 명확한 푯대로 저 앞에 세워져 있습니까? 회복되지 않은 흔적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림에서 흔적만 있다면 그것은 얼룩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흔적의 바른 의미를 회복시켰을 때, 우리가 본 그림의 의미와 방향이 회복되고, 소녀의 방 전체가 환히 밝아지듯이, 우리 삶에서 십자가의 흔적들이 그 의미를 회복하여 푯대가 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삶은 방향을 회복하고, 질서를 얻으며, 주가 비추어주시는 빛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회복은, 우리 삶에 주께서 남겨주신 흔적들을 발견하고, 거기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회복할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그 흔적들을 남기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찬양 중에,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양심을 통해, 꿈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심지어 우연히 찬장에서 떨어지는 찻잔을 통해서도 우리 삶에 주의 흔적을 남기시며 우리를 흔드십니다. 살짝 꼬집기도 하고, 아프게 다리를 절게 하게도 하며 흔적들을 통해 나의 자아를 흔드시고, 나 스스로의 길을 혼란스럽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그것들이 내가 생각한 길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참된 길로 이르게 하는 새로운 이정표로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 주변에 하나님이 남기신 흔적들에 귀기울여 보십시오. 우리는 곧 우리 삶이 하나님이 세워주신 이정표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흔적과 이정표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명확한 빛을 향하고 있음을 그 길을 따라가면서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를 얻고, 주가 말씀하시길, 내가 너를 잘 안다. 고 말씀하시는 그 친밀한 관계로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내 등을 톡톡 치기도 하시고, 살짝 꼬집기도 하시고, 넘어지게도 하시고, 어리둥절하게도 하십니다. 여호와의 성전을 수리했던 요시야 왕처럼, 내 삶의 무너진 성전을 내가 회복하기만 한다면, 내 삶의 기도의 등불을 늘 켜놓고, 주께서 주시는 말씀에 늘 귀를 기울인다면, 주의 흔적들에 무심하지 않고, 갈망을 가지고 귀를 기울인다면, 주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 흔적들을 따라 나에게 나아오라. 내가 네 삶에 세운 푯대를 향해 달려오라. 거기서 내가 너를 만나고, 네가 나를 만나며, 우리가 서로를 얻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우리 삶에 십자가의 흔적들이 회복됨으로 우리 모두가 주님과 하나가 되고 부활의 능력과 영광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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