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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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로서 자기 자신

jo_nghyuk 2023. 7. 31. 06:03

6월에 워크샵 참석차 파리에 다녀왔다. 아내와 아들과 함께 신학부 근처인 5구 지역에 숙소를 잡았다. 파란 대문을 들어가면 건물들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안뜰이 있고 울퉁불퉁한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오래된 파리의 가정집이었다. 도착한 월요일 우리는 근처 카르푸에서 생수와 빵, 잼 등을 사고 동네를 산책했다. 집 앞 거리에는 분수가 있었고 아이들과 부모들이 쉬고 있었다. 적당히 활기찬 길거리와 적당히 한적한 동네 골목을 모두 가지고 있는 좋은 거주지역이었다. 화요일부터 나는 워크샵을 시작했고 아내는 아이와 함께 파리 여행을 시작했다. 이번 학회의 주제는 <타자로서 자기 자신>이었다. 

수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발표를 하고 아내를 만나러 오페라 지구로 간 그날, 집주인에게서 집 근처에서 폭발 사고가 있었다고 문자가 왔다. 당장은 소방차들이 불을 끄고 있고 근방의 구역이 통제 중이어서 숙소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마침 음악 축제가 있는 날이어서 거리마다 재즈, 락, 남미 음악 따위를 연주하고 있었다. 한 쪽에서는 폭발 사고가 일어나서 건물 한 채가 무너져내렸는데 다른 쪽에서는 흥겹게 악기를 연주하고 즐겁게 저녁을 먹고 있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구역 통제가 풀린 뒤 자정 무렵 숙소에 돌아왔다. 매캐한 냄새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뉴스를 보면서 40여명의 사상자 중에 유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밥을 먹다 말고 나는 흐느껴 울었다. 며칠 전에 보았던 그 분수 앞에서 내 아이와 같은 다른 아이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 부부와 같은 다른 부부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 같은 다른 어머니가 있었을 것이다. 나와 같은 타자가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파리의 먼 지역에 있었다면, 내가 가보지 않은 동네에서 벌어졌다면 그렇게 흐느끼며 울지는 않았을 것 같다. 같은 생 자크 거리에 살고 있었고, 같은 장난감 가게를 방문했을 것이고, 같은 분수 앞 벤치에 앉아 있었을 그 누군가가 다친 것이다. 그 누군가는 나의 이웃이다. 리쾨르가 말했듯이 가장 멀리 있는 사람도 사실은 나와 닮은, 나의 이웃인 것이다. 금요일에 나는 Prix d'exellence를 수상했고 기뻐했지만, 동시에 어떤 깊은 죄의식과도 같은 연대를 향한 책임의식을 함께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독일로 떠나기 전날 밤, 나는 사고 현장을 방문했다. 분수는 검게 그을려져 있었고 장난감 가게의 유리창은 깨지고 물건들이 쏟아져 있었다. 이웃 아파트들의 창문들도 부숴져 있었다.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을 시간이 오래 지나기 전에 기록해두려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나의 개인적인 기쁜 소식을 기록하는 일이 건물이 무너져 내린 그 거리의 반대편에서 흥겹게 축제를 즐기는 것은 아닐까 주저하게 된다. 어쩌면 신앙인의 영성이 무너진 이웃 옆에서 혼자서 자유하고 기뻐하는 것이라면, 그 영성은 올바른 것일까? 독일로 돌아온 직후, 한 이민자 가정의 소년이 프랑스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그 배경에 자리했던 이민자들의 억압과 설움이 전경에 드러나는 것을 본다. 예수님은 그을린 분수 옆에 앉아 계시다. 이민자들 사이에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함께 슬퍼하고 계시다.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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