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26th June From De Poort /GMT + 1hour 6:54pm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26th June From De Poort /GMT + 1hour 6:54pm

jo_nghyuk 2009. 7. 13. 05:53

방문을 닫고 나면 정말 혼자인 듯하다. 그리고 더욱 내면화되어지기 쉽다. 외부의 문이 닫히고 비로소 나의 내부에 시선을 돌렸기 때문이다. 릴케였던가. 눈은 외부의 창이다. 그래서 눈을 감으면 내부의 창이열리게 되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게 된다고. 이곳 암스테르담에서 나는 버지니아 울프가 모든 여성 작가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남성 작가는 당시 모두 가지고 있었던) "자기만의 방" 을 소유하게 되었다. 정확히 묵상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조용히 창 밖을 보며 음악을 듣거나, 글을 쓰거나 창문 틀에 앉아 기타를 치기에 적당한 크기의 방이다.


네덜란드 집의 창문은 매우 넓다. 창문을 열면 내가 집 안에 있다기 보다는 외부로부터 단지 창 하나를 두고 살고 있는 듯한 기분이 그래서 들게 된다. 외부로부터 단절감을 느끼지 않아 참 좋았고, 내 방의 문을 복도로부터 닫고 화이트 색상의 젠하이저 헤드폰 하나만 끼고 조용히 음악을 틀어놓으면 차분히 고독solitude(not loneliness) 가운데에 내면에 천착할 수 있다는 것도 매우 기뻤다.


몇 평 남짓한 방 안에는 세면대, 거울, 벽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창, 꼭 필요한 만큼의 세면도구, Canon 300d, 몇 장의 셔츠와 검정 조끼, 빨간 아디다스 뮌헨 져지, 동생에게서 빌려온 Boston MLB 모자, 큰 주황색 배낭, 공간의 반을 차지하는 핑크색 커버를
씌운 매트리스를 놓은 침대 그리고 유럽 지도가있다. 김경주의 여행 산문과 론리 플래닛 아이슬랜드 영문판, 여행사에서 집어온 아이슬랜드 소개 팜플렛, 메세지 성경, NIV 성경, 굿 뉴스 성경, 포켓 성경, Dutch phrasebook, 워털루 광장 가판대에서 산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그리고 네덜란드에 관한 연구 서적도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죽기 위해 이 도시로 온다" 말테의 수기는 이 구절로 시작하지만
나는 "그래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 도시로 온다"라고 말하고 싶다. 암스테르담은 자유의 도시이며 refugee들의 거처이기도 하다. 그런데 월요일과 금요일 홈리스들을 만나고 도심의 Red Light District를 지나고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마리화나 냄새를 맡은
이후로 나는 이 도시가 더 이상 낭만적으로만 보이지가 않았다. 이 도시는 단지 '노출된' 환락의 장소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한번 릴케의 소설을 집에서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다 읽지도 않은 소설에 공감하는 것과, 그 책을 지금 열어서 다시 그 공감대의 대목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어쩐지 머쓱한 일이었다. 만약 그런 의미를 그가 의도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런 대목이 없거나 그 의미가 어정쩡하다면, 그리고 그 넘겨짚음을 타인이 본다면,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노트북을 가져오지 않아서 옆 방 형제들에게 가끔씩 빌려서 사용하고 있는데, 사실 노트북이 없는 것은 슬리퍼를 가져오지 않은 불편함의 정도인 것 같다. 신발과 샌들을 가져왔는데, 나름대로 별 어려움이 없다. 그리고 "떠난다"는 것은 한 쪽의 문을 닫고 다른 쪽의 문을 여는 것과 같아서, 매일 같이 노트북의 창문을 열고 블로깅하는 것이 어쩐지 아마추어 저널리스트journalist 같은 분주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사실 조개같이 입만 벌리고 있는 노트북은 나에게 진주를 양산해주지 않는다.
매일 내가 본 것을 바로바로 외부에 기고해야 하는 압박감은 그만큼 내면에서 숙성시킬 시간을 재촉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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